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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Nov 09. 2019

아리랑

조정래 작가님의 장편소설 '아리랑'을 읽고.

조정래 작가님의 장편소설 아리랑을 읽었다.

일제시대 35년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낸 아리랑을 읽으며 나의 가슴을 울렸던 장면들을, '일제시대에 대하여, 일제의 탄압, 친일파에 대하여, 민족혼을 지키려는 노력들, 안타까운 상황들, 인간의 속성'의 총 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적어 본다.


[아리랑_조정래 저, 해냄출판사]


[일제시대에 대하여]

1) 한반도의 인구가 2천여 만이었던 일제 말기에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은 대략 170여만이었다. 그 수는 전체 민족의 10퍼센트에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자들이 무력을 갖춘 일본 총독부의 세력과 야합함으로써 나머지 90퍼센트의 동족을 처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제7권 _ 작가의 말 중에서)


2) '독일은 수상 빌리 브란트가 전 세계를 향해서 사죄를 했고, 유대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사죄를 받아들여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에 도달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독일과 정반대로 교과서를 왜곡하고,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계속 망언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것인가. 일본이 독일식의 용서를 빌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은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그 동의에 충실하고자 나는 '아리랑'을 쓰는 것이다.

내 대답에 그들은 동감했다.

해방 50년 - 우리는 용서하지도 말고 잊지도 말아야 한다.

(제10권 _ 왜 아리랑을 쓰려하는 것인가 하는 외국 신문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


3) 고등학생이 되어 역사시간이 아닌 국어 시간에 느닷없이 어떤 시조 한 수를 대하게 되었다.


다 깨어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을 알 리 알까 하노라


이것은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육당 최남선의 '깨진 벼루의 명'이라는 시조였다.

국어 선생은 쓰게 웃으며 '친일을 안 할 수 없었던 입장을 쓴 거다'며 이 한마디로 지나갔다.


나의 분노는 두 가지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첫째는 친일 한 자가 어찌 이렇게 뻔뻔스러운 변명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어떻게 이런 시조가 교과서에 실릴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다시 최남선의 시조를 읽어보라. 그 시조 아닌 시조에 친일파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세우는 '상황 불가피론'과 '책임회피', '책임전가'가 얼마나 충실하고 뻔뻔하고 교묘하게 잘 나타나고 있는가. 이것은 바로 1960년대를 풍미하고, 19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친일파들의 자기변호를 넘어선 역습 논리인 '그때 조금씩이라도 친일 안 한 놈이 어디 있느냐', '네가 그때 살았으면 별수 있었을 것 같으냐', '너는 뭐가 잘났다고 그러느냐', '이제 와서 친일이고 뭐고 따지는 건 다 촌놈들 짓이야' 이런 언행들이 횡행하게 만든 바탕을 이룬 것이었다.


친일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한 새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라서 취직이 안 되고, 일제의 고등계 형사질을 하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자들이 새 나라의 경찰로 둔갑해서 똑같은 지하실에서 다시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하고, 친일파들에 대한 연구를 하던 젊은 학자가 사회진출이 완전 차단되어 버린 사실 같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가면서 나는 끝없이 괴로워했고 아픔을 겪었고 밤잠을 설쳤다. 그러면서 반역의 역사에 대한 나의 분노는 이성화되었고, 증오는 논리화되어 갔다.

(제12권 _ 아리랑의 밑뿌리에 대한 조정래 작가님의 글)


4) 나는 '아리랑'을 시작하면서 나 자신의 의지를 어느 부분 믿을 수가 없어서 써붙인 글이 있다.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00여만!

200자 원고지 2만 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인가!

이건 '아리랑 집필 계획'이란 종이 아랫부분에 빨간색으로 쓴 나 자신에 대한 경고문이었다.


나는 '아리랑'을 쓰면서, 쓰는 일 자체에서 오는 지겨움과 괴로움에 부딪힐 때마다 그 시대를 처절한 고통 속에서 위대하게 싸우다 죽어간 많은 분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나를 추스르고는 했다.


과연 내가 그 400여만의 원혼들을 위로할 수 있을 만큼 글을 써냈는가 하는 생각이 돌이켜지기도 한다.

(제12권 _ 아리랑 집필에 대한 조정래 작가님의 감회)


[일제의 탄압]

1) 총독부에서는 1938년의 조처에 이어 금년(1941년) 3월 31일부로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하고 조선어의 학습을 폐지시키는 국민학교 규정을 공포한 것이었다. 이로서 모든 교육기관에서는 조선어 교육이 완전히 폐지되게 되었다.

(제11권 _ 국민학교 개칭)


2) '넌 전향서 쓰기를 거부했고, 창씨개명까지 거부한 악질 불량 선인이야. 거기다가 근자에는 아이들에게 기묘한 방법으로 배일사상까지 전파하고 있단 말야. 너 같은 지능적이고 교활한 악질분자들을 위해 제정된 법이 뭔 줄 아나? 그게 바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다. 널 그 법에 의하여 오늘부로 구금 조치한다.'

사찰 과장의 살벌한 외침이었다.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전국적으로 발표되는 속에서 총독부는 전국 총호수의 87.4퍼센트가 창씨개명을 했다고 그 실적을 발표하고 있었다.

(제11권 _ 창씨개명)


3) 일제는 160여만 명을 강제 징용했고, 30여만 명의 여자들을 위안부와 정신대로 끌어갔고, 4,500여 명의 학도병을 포함해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은 40여만 명이었다.

(제12권 _ 일제시대로 인한 직접적인 인명 피해)


[친일파에 대하여]

1) 소학교 선생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가 5년형을 받은 문 선생은 친일파의 척결을 첫 번째의 과제로 꼽았다. 군인과 경찰. 민간인을 모두 합해서 조선땅에 와 있는 왜놈들은 70여만인데 거기에 붙어먹고 있는 친일파들은 그 두배가 넘는 150여만이라는 것이었다. 왜놈들보다 그들을 먼저 없애지 않으면 나라를 되찾는 건 세월이 갈수록 어려워질 거라고 했다. 왜냐하면 일본의 압제는 점점 심해지고 친일파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독립을 체념하게 되고 마음이 흔들려 친일파는 자꾸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친일파를 제거하는 것은 왜놈들의 손발을 끊는 것인 동시에 많은 조선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중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10권 _ 친일파를 제거해야 하는 이유)


2) 변하는 인심 탓하지 말세나. 사람은 어차피 그런 것이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믿세. 2천만 중에서 마음 변한 자들은 150여만. 마음 변하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가. 우린 든든하고 배부르네.

(제11권 _ 허탁이 송중원에게 보낸 쪽지에서)


3) 조선이나 중국이나 왜놈들에게 빌붙는 놈들 때문에 전도가 더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왜놈들보다 더 흉악하고 더러운 종자들. 체포당하는 모든 투사들의 뒤에는 어김없이 그놈들의 밀고가 있었다. 똥통의 구더기만도 못한 놈들. 생각할수록 분노와 증오는 커지기만 했다.

(제9권 _ 송수익의 생각)


4) 그러나 일본 경찰력과 맞서는 과정에서 실패는 거듭되었고 결국 남은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상처뿐이었다.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면 쟁의를 통해 부분적으로 요구조건을 관철시킨 것이었고, 사회주의 의식을 대중적으로 보다 넓게 확산시킨 점이었다. 일본 경찰이란 가공할 살인집단이었다. 일본 경찰력이란 무한대로 자행하는 폭력과 금력을 동원한 밀정 공작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폭력보다 더 문제가 밀정과 끄나풀들이었다. 모든 조직이 탐지되는 것은 그들에 의해서였고, 그들은 모두가 조선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탈을 쓰고 조직에 숨어들거나 조직원들 옆에 밀착해 정보를 빼내갔다. 조선사람들을 잡아먹는 조선사람들, 그 인간들 때문에 일본 경찰력은 날로 강대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군상들이 하나도 없었다면 일본 경찰력이 그렇게 강해질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제10권 _ 밀정)


5) '많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 두 배, 300만이라도 다 죽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놈들은 왜놈들과 함께 동족을 살해한 공동 살인범이기 때문이고, 민족 전체를 박해하고 고통 속에 몰아넣은 공동 가해자들이기 때문이고, 그놈들이 훼손시킨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그놈들이 짓밟은 민족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 이후 지금까지 도처에서 죽어간 동포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줄잡아 300만이 훨씬 넘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다 죽이는 게 수가 너무 많습니까? 그놈들 하나가 동포 둘을 죽인 꼴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죽일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다 죽이는 게 수가 너무 많습니까? 그건 왜놈들이 죽였지 그들이 죽인 게 아니라고 말하진 맙시다. 그건 해방이 되는 날 바로 그놈들이 하게 될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변명이니까요. 물론 그놈들 중엔 직접 죽인 놈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놈들도 있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들 모두가 왜놈들의 살육에 가담한 공동 살인범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민 선생도 3.1 운동의 선봉에 섰으니깐 잘 아시겠지만 그때 총질을 하고 고문을 한 게 왜놈 순사와 형사들뿐이었습니까? 그때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2년 전인 41년에 임정이 발표한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게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가차 없는 처벌을 첫 번째로 꼽은 점입니다. 그 문제의 처리는 독립투쟁만큼 중요합니다.'

(제11권 _ 친일파 척결에 대한 송가원의 의견)


[민족혼을 지키려는 노력들]

1) 그들은 용맹스러웠다. 보잘것없는 무기로 신식무기를 갖춘 적들과 맞서 싸웠다.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어갔다. 누가 강제로 끌어낸 것도 아니었고, 싸움에 이긴다고 무슨 보장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싸우다가 죽어갔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사람대접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하층민들이었다. 대대로 빼앗기고 무시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내걸고 나섰던 것이다. 그들의 지고한 마음과 뜨거운 용맹 앞에서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비해 임금은 무엇이고, 대소 벼슬아치들은 또 무엇이었는가. 임금은 왜놈들에게 손발 묶인 허깨비였고, 모든 벼슬아치들은 왜놈들의 앞잡이요 매국노들이었다. 결국 나라의 참된 주인은 왜적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도운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제2권 _ 나라의 참된 주인)


2) '보라, 조선의 사나이 된 자들이, 더욱이 배움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그건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항일이냐, 친일이냐 하는 것이다. 아니 또 하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항일도 친일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엉거주춤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친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것이 왜 친일인가? 조선인에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일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욱이 배움을 가진 지식인들은 그 책무가 더 커진다. 그런데 왜놈들의 범죄를 방관하다니. 범죄를 방관하는 것은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고 동조하는 것은 또 다른 범죄다. 그러니 그게 친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민지가 된 이 땅에서 지금 가장 고통받고 고생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은 누구 인가. 그들은 바로 배움도 없고 가난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왜놈들의 착취 정책을 피할 능력이 없이 매일매일을 고통에 시달리며 피해를 가장 많이 받고 살 수밖에 없다. 고통과 싸우는 그들의 생활, 그건 바로 항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방관에 비하면 그건 적극적인 항일이 된다. 그럼 그 수많은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 사람들을 구할 책임이 바로 지식인들에게 있다. 그게 지식의 대의며 지식인의 사명이다. 그럼 어떻게 그들을 구할 것인가.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바쳐 그들이 못 배운 바를 일깨워야 하고, 깨달음에서 생성된 힘을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해야 한다. 자각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항거, 그건 그들의 해방인 동시에 조선의 해방이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라. 마음을 크게 열고 세상을 대하라. 식자들이 망친 나라를 식자들이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7권 _ 이경욱의 속말 중)


3) 제군들 하나하나가 전부 조선이다! 조국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계속 승리만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실패도 하고 패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수치가 아니요 치욕도 아니다. 투쟁에 나서지 않고 투쟁을 기피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비굴이고 치욕이다. 우리 조선인의 정의는 투쟁이고, 가장 큰 명예는 투쟁하다 죽는 것이다!

(제8권 _ 신흥 무관학교의 가르침)


4) '글쎄, 그거야말로 시각의 차이고 생각의 차이가 아닌가 싶네. 3.1 운동을 독립 성취로만 직결시켜서 따진다면 분명 실패지. 그러나 그걸 그렇게 단순화시켜서 보아서는 곤란하지. 3.1 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우리 민족 전체에게 일본과는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각성시켰고, 또한 우리가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확인시켰다는 점이네. 그리고 3.1 운동을 계기로 해외의 독립투쟁이 얼마나 치열해졌던가. 문제는,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네. 그게 당장 독립을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실의에 빠진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고, 고통당하고 있는 인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체념에 빠져드는 전민족에게 새롭게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거든. 그런 의미에서 6.10 만세운동도 손실만 있었던 건 아닐세.'

(제8권 _ 허탁과 송중원의 대화)


5) 그런데 조선사람들을 환호하게 하는 쾌거가 터졌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것이었다. 그 소식은 의기소침해 있는 조선사람들에게 만만세를 외치게 할 수 있는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조선사람들이 다 같이 의기를 품게 하는 사건이 터졌다.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골인하는 장면의 사진을 실으면서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제10권 _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6) 대원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입니다.

그 말을 송수익 선생한테서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 벅차고 황송했는지 몰랐다. 그 감동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용솟음치게 했고 목메게 했으며 자세를 흩뜨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도 늘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제10권 _ 제3사 2 단장 이광민의 생각)


7) 위장을 위한 위장으로 감수해야 하는 것이 고통인 것을 알면서도 정도규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소극적으로라도 친일행위를 하게 되는 것도 그렇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속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는 비웃음과 손가락질이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지하투쟁보다 더 어려운 투쟁입니다. 그러나 견디셔야 합니다. 그런 고통을 감내하고 계시니까 저희들의 지하투쟁도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11권 _ 정도규의 위장전향)



[안타까운 상황들]

1) 전세가 불리한 상태에서 며칠을 싸웠지만 약속된 안승우의 원병은 오지 않았다. 김백선은 많은 부하들을 잃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한 그는 약속을 어긴 안승우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런데 총대장 유인석은 오히려 김백선을 처형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평민이 감히 양반에게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 유인석의 의병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김백선의 죽음으로 평민이 절대 다수인 의병 대중의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탓이었다. 결국 유인석은 의병을 해산하는 궁지에 몰렸고, 소수만을 이끌고 중국 요동 지방으로 이주하는 운명에 처했다.


원수부 13도 총대장이 된 이인영은 군사장을 비롯하여 각 지방별로 일곱 명의 의병장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 대장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유생 일색이었다.

그 결과를 보고 송수익은 또 앞이 가로막히는 벽을 느꼈다. 그들이 과연 일본군을 상대로 하여 싸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지체 높은 양반 유생들끼리 감투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성을 공격해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려는 군대라면 마땅히 대장도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부대를 지휘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분명 있는데도 그들은 또 지체를 앞세워 능력을 묵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권 _ 의병 내 양반과 평민 간의 갈등)


2) "십장들은 다들 똑똑히 들어라. 지금 길거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인부 놈들은 학생들보다 훨씬 더 나쁜 놈들이다. 그놈들은 앞으로 절대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 십장들은 지금부터 그놈들 명단을 하나도 빠짐없이 작성해서 보고하라. 만약 내용이 정확하지 않고 누락자가 있을 시에는 십장들을 문책할 것이다."

(제6권 _ 만세운동 후 일본인 순사의 말)


3) 여자들은 한바탕 걸직하게 욕을 퍼대고는 다시 허리들을 굽혔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욕이 아니었다. 지주에 대한 울분의 토로였고, 가슴에 맺힌 한의 탄식이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한바탕 욕을 하고 나면 그래도 속이 풀려 다시 일손을 잡을 힘이 생겼다. 소작인들은 누구나 들녘에 나서면 맘 놓고 지주들을 욕하고 흉을 보았다. 넓은 들판은 그 욕을 다 받아서 아무 탈 없도록 감추어주었다.

(제8권 _ 소작쟁의)


4)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체질화되어 있는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 전문가들은 돈이 절대 권능을 발휘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천민자본주의가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횡행한 이 사회의 40년과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들이 누구인가?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 파렴치한의 표본이 아닌가. 그들이 저 대통령에서부터 사회 구석구석의 기득권을 장악한 채 40년을 지배한 이 땅에 어찌 정의가 있고 양심이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천민자본주의도 바로 그자들에 의해서 잉태되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아리랑'을 통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도 소상히 쓰려고 노력했고, 그들이 왜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제12권 _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의 근원)


[인간의 속성]

1) 하야가와는 상대방의 느낌이나 생각 같은 것은 아예 묵살해 버렸다. 무엇이든 주입이 필요한 경우에는 말을 강하게 하고, 같은 말을 몇 번씩이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확신에 찬 강조가 반복되는 동안에 상대방이 품고 있는 의혹을 죽이고 의심을 무찌르고 의문을 없애면서 믿음을 싹트게 하는 것이었다.

(제3권 _ 하야가와와 장덕풍의 대화)


2) 방영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회의 속에 여러 가지 후회가 휘감기고 있었다. 가장 큰 후회는 애초에 눈 딱 감고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거나 말았거나 모금을 딱 외면하고 돈을 모아 태평양 건너가는 배를 탄 사람들이 수백 명이었다. 그때 그들을 제 욕심밖에 못 차리는 인종 못된 것들로 취급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똑똑했다는 생각이 들고 부러워지는 것이었다.

(제8권 _ 하와이에서 방영근의 생각 중)


3) 하와이의 조선사람들은 세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그 누구든 자식들에게 다시는 농장 생활을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들의 고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들의 마음이었다. 농장 생활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학교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열은 더없이 뜨거웠다. 둘째, 밥에다 김치를 먹듯이 조선사람으로서의 생활과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여름뿐인 땅이었지만 해가 바뀌면 꼭 설을 쇴고, 비록 양주를 따라 올리더라도 꼭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셋째, 어떻게 해서든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만이 아니었다. 실생활에서 노란둥이라는 차별에다가 나라 없어서 당하는 설움이 겹쳐지고 있었다. 일본 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무시와 멸시 그리고 손해를 언제나 당하며 살고 있었다.

(제9권 _ 하와이의 조선사람)


4) 차득보는 농사를 지어갈수록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생명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물보다는 식물이 더 강인한 것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이었다. 강아지풀을 낫으로 싹 베버리면 삼사 일이 지나면서 잎들과 꽃술 줄기가 어엿하게 솟았다. 하도 놀랍고 신기해서 다시 싹둑 베버렸더니 역시 거짓말처럼 또 제 모습을 갖추었다. 풀이 그렇게 빨리 자라난다는 것도 희한했고, 다시 제 모습을 갖추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싹둑 베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서야 제 씨를 뿌리고 죽겠다는 강아지풀의 강인한 생명력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과 함께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언제까지 몇 번이나 그러는지 보고 싶었다. 다시 싹둑 낫질을 해버렸다. 그러기를 두 달 동안 했고, 강아지풀은 찬바람이 불어오고 모든 풀들이 스러지는 그때까지 두 치 정도밖에 자라지 못한 난쟁이로 끝끝내 꽃술 줄기를 피워 올리는 것이었다. 그 지독스러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경이로운 일을 공허 스님한테 말했더니, '허, 니가 인자 득도를 하능구나. 그려서 부처님께서 살생하지 말라고 이르셨느니라. 그리혀서 생명이 지탱되는 동물은 이 시상에 없응게.'하며 대견해했던 것이다. 피라는 것도 강아지풀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리 열성으로 뽑아도 남아 있는 뿌리에서 또 새 잎과 줄기가 돋아 오르는 것이었다.

(제10권 _ 차득보의 생각)


5)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나가는 대로 솜옷이든 털옷이든 두꺼운 것으로 사 입어라. 애비 생각해서 애비보다 춥게 입고 있는 것이 효도가 아니다. 애비 마음 쓰이게 하는 것, 그게 불효야. 알겠느냐?'

(제10권 _ 송수익이 자신을 면회 온 작은아들에게 한 말)


6) 송중원은 우지마의 눈을 쳐다보며 아주 우호적인 웃음을 보냈다. 그런 자들을 대할 때는 눈길을 피해서는 안되고, 그러면서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송중원은 잘 알고 있었다. 눈길을 피하면 당장 의심을 하고 들고, 무서워하는 척하지 않으면 사적 감정으로 해코지를 하려고 들었다. 고문하는 자들이 고문에 굴복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해 으레 사적 감정을 돌발시켰다. 그때부터 고문은 극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제11권 _ 형사 우지마와 송중원의 대화)


<책장을 덮으며>

5,000년 반세기의 역사에 일제 치하 35년은 매우 짧은 시기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아리랑'을 읽고 나니, 그 일제 치하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지난 3개월. 조정래 작가님의 '아리랑'을 읽으며, 일제시대와 현재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큰 안목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민족혼을 바로 세우기 위해, 현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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