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하며, 삶의 소중함을 깨닫다.
브런치를 통해 알게 된,
고재욱 작가님의 신간.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를 읽었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책이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7년간 100여 명의 치매 환자를 떠나보내며 배운 것들을 적은 책이다.
책을 읽으며 세상에 덜 소중한 삶은 없다는 것과 그 무엇보다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고 느끼게 해 준 표현들을 적어본다.
이 책은 요양원에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치매 노인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두서없이 뒤섞인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엮은 글이다. 치매 노인들의 조각난 기억들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반복되는 퍼즐 맞추기를 하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의미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요양원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그 죽음 앞에서 하찮은 삶은 없었다.
흔히 치매 환자의 행동을 두고 ‘벽에 똥칠한다’라고 비하하는 경우가 있다. 요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저귀를 착용한 상태에서 자신이 그걸 치워보겠다고 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대변을 보고 스스로 뒤처리를 하겠다는 본능은 있는데 몸은 이미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치매 노인들의 마지막이, 설령 모든 기억을 잃었거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도움받는다 해도 온전하게 존중받기를 바란다.
요양원은 죽음을 앞둔 치매 노인들이 삶을 연명하는 곳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을 보살피고 치매 환자 가족의 책임을 사회적으로 함께 나누는 곳이다. 요양원이 치매 노인들과 가족들에게 기꺼운 쉼을 줄 수 있기를, 치매 노인들의 잊힌 기억을 찾아내고 그분들이 살아온 시간을 기록할 수 있기를, 한 사람의 지난 여정이 앞을 향해 걷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내가 그러한 일에 쓰임 받기를 나는 꿈 꾼다.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을 보다 보면, 부모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은 절대로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지금껏 수백 명의 노인들을 봐왔지만, 나는 아직까지 자식을 원망하는 노인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단 한 명도 없었다.
창밖으로 바람을 기다리는 민들레 군락지가 눈에 들어왔다. 치매라는 병으로 대부분의 기억을 잃어버리고도 자식 걱정뿐인 할머니 마음은, 민들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위해 언제든 흩뿌려질 준비가 되어 있는.
지인이 물었다.
“많고 많은 일 중에 왜 하필 다른 사람 똥이나 치우는 일을 하냐?”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르신들이 종일 똥만 누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물었다.
“치매 환자들이 뭘 할 수나 있냐?”
완전히 틀렸다. 치매 환자라고 해서 일상이 없는 게 아니다. 그들도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멀쩡한 사람이 보기에 느리고 불편해 보일 뿐이다. 어쩌면 매일 전날의 기억은 모두 잊고 완전히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구태의연한 일상을 반복하는 바깥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신선한 하루를 보낸다고 느낄 수도 있다. 기억이 10분 이상 지속하지 않는 어떤 분들에게는 매 순간이 삶의 시작이니까.
‘치매’라는 말은 한자로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치매라는 단어 대신 ‘인지증’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은 요양원 수를 늘리기보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인지증에 대한 기본 교육을 하고 있다. 이미 2017년에 ‘인지증 서포터스’가 1천만 명을 넘어섰다. 지역사회에서 인지증 환자들을 피하지 않는 모습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요양원 수를 늘려가고 있다. 이 모습은 사회로부터 치매 환자를 분리하려는 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정부는 ‘침 국가 책임제’란 단어를 공식적인 정책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중략)
일본 요양시설의 첫 번째 설립 목적은 치매 환자의 재활을 도와 가정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요양원에 입소한 후 가정으로 복귀하는 노인을 본 적이 없다. 노인들이 요양원을 꺼리는 이유는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나 나올 수 있는 곳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입견이 아니라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요양원 현실이 그렇다.
“할아버지는 어쩌다가 돌아가셨어요?”
“갑자기 배가 아프다 캤어. 어데 아프단 소리를 하지 않던 양반이었거든. 부리나케 병원엘 갔제. 그런데 이거 저거 검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 골목에서 고마 쓰러져버렸구만. 위암 말기라 카데. 그런데도 그 양반이 다시는 병원에 안 갈라 하는기라. 죽어도 집에서 죽는다꼬. 돌아가시는 날가지도 내한테 팔베개를 해주고는, 그렇게 가부렸어. 나이 예순여덟에.”
“벌써 20년 전이네요. 그동안 할머니 마음 많이 아프셨겠어요.”
“처음엔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대못이 백힌 거 같았제. 아주 말도 못 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겠더라고. 가슴에 못 하나가 백히긴 했는데, 그 못이 내를 아프게 하는 기 아니고 내를 살게 하는 사랑 못이란 걸.”
나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가슴에 박힌 못이 어떻게 할머니를 살게 한다는 거예요?”
“그 양반이 내한테 준 사랑이 두고두고 떠올랐다 아이가. 그 양반은 황망하게 갔어도, 그 사람하고 지내던 시절의 추억이 떡하니 가슴에 못으로 백혀서는 내를 살 수 있게 해 주더라고. 그때 알았제. 떠났다고 다 끝이 아니란 걸 말이여.”
어쩌면 이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조건일 것이다. 바로 ‘집과의 거리’다.
영국에서 거론됐다는 부모님 모시기에 좋은 거리가 있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거리는 ‘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라고 한다. 즉, 부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따뜻하게 가져갈 수 있는 거리 정도에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일본에서는 10여 년 전, 장국이 식지 않는 거리를 측정했다고 한다. 날씨가 영상 4~5도 정도일 때 국이 식지 않는 거리는 도보로 1.8킬로미터 정도였다. 부모님을 모시기 위한 곳이 너무 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도움을 받는 일에 어색해하는 할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어르신과 제가 그전에 만난 적은 없지만, 제가 아직 어렸을 때 어르신께서 그 힘든 시절을 견뎌주셔서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제 젊은 우리가 어르신들을 보살펴드릴 차례니까요. 제가 더 늙어서 병이 들면 또 다른 젊은이가 저를 지켜줄 테죠. 그래야 이 세상이 유지될 게 아니겠어요? 이제 자녀분들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것이 어때요? 어르신을 보살필 기회요.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자녀분들의 마음이 몹시 아플 거예요. 요양원에 모신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 아파하고 있을 테니까요.”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손을 잡아야 한다. 체온은 말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많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우리는 그저 손을 맞잡고만 있었다.
삶의 마지막 시간을 알고 있다면,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며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될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하며 살지 않을까?
삶의 마지막 시간은 반드시 온다. 누구에게나.
우리는 언제나 내일을 떠올리며 산다. 바쁜 오늘 때문에 당장은 급해 보이지 않는 일, 사랑이나 행복 같은 일들을 내일로 잠시 미뤄둔다. 하지만 내일이면 너무 늦을 수 있다. 모든 이별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오늘 당장 사랑하는 일, 오늘의 행복을 참지 않는 일이다. 오늘이 세상의 첫날인 것처럼 온통 나와 당신을 사랑하고,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아낌없이 행복해야 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마음뿐이기에.
고재욱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9년 겨울이었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적은 글에 댓글을 남겨 주셨다. 그 이후로도 꾸준하게 라이킷도 눌러 주셨다. 나 또한 작가님의 브런치를 자주 찾았다.
누구나 죽음을 겪는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법륜 스님은 이를 ‘얼음이 물로 변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셨다. 또한 우리 모두는 본인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을 접한다.
집안 친척 어른. 부모님. 친구 또는 선후배 등.
준비되지 못한 죽음이란 이별은 남겨진 많은 이들에게 그리움을 남긴다. 예정된 이별은 헤어짐의 아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재욱 작가님은 다른 이들의 죽음을 아름답게 준비해 주시는 분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이 있다. 그 오래전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치매일지도 모른다. (작가님의 이야기처럼 치매라는 표현을 ‘인지증’과 같은 표현으로 바꾸는 것도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치매 증상이 있는 노인들을 이 사회에서 격리하고 있을 때, 그는 그 노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 이야기 속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자녀가 있었다.
주말 간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아직 부모님이 젊다고 생각하지만, 특히 아버지의 다리는 무척이나 얇아져 있었다. 마라톤 풀코스를 수십 번 완주하셨던 다리는 무척이나 앙상해져 있었다.
내 앞길만 달려가는 동안, 부모님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보다는 현재의 삶을 사랑하자고.
나의 삶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나를 사랑해 주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자고. 특히 부모님을 사랑하자고.
죽음을 앞둔 수많은 노인분들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의 행복은 나중에 크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 느끼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죽음을 통해 삶의 소중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