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인사 Jul 07. 2020

언어의 온도

따뜻하게 말하기

유독 회사에 거친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나한테 함부로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고 경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너희들에게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회사에선 차갑게 날이 선 거친 말을 듣는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해도,

가랑비에 옷 젖듯,

퇴근길 이내 마음은 많이 무거워진다.


“아빠~~~~”라고 외치며 품 안에 달려드는

아이들의 따뜻한 언어는 삶의 균형을 맞춰준다.


차가운 사회의 언어로 얼어붙은 내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는

이기주 작가님의 ‘언어의 온도’를 읽었다.


‘언어의 온도’에서 느꼈던,

마음 따뜻한 이야기들을 적어본다.


[언어의 온도_이기주 지음_말글터 출판사]


1) 더 아픈 사람

 언젠가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손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꼬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할머니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듯했다.

 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순간, 난 할머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의 유형을 몇 가지 예상해 보았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라거나 “할머니는 다 알지”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었다. 내 어설픈 예상은 처절하게 빗나갔다. 할머니는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의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리고 아파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어린 손자에게 할머니가 알려주려고 한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니었을까?


2) 사과

 사과를 뜻하는 단어 ‘apology’는 ‘그릇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그리스어 ‘apologia’에서 유래했다. 얽힌 일을 처리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지닌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승리의 언어가 사과인 셈이다.


 미안함을 의미하는 ‘sorry’는 ‘아픈’ ‘상처’라는 뜻을 지닌 ‘sore’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일가. 진심 어린 사과에는 ‘널 아프게 해서 나도 아파’라는 뉘앙스가 스며 있는 듯하다.


진짜 사과는,

아픈 것이다.


3) 타이어

 “전 타이만 봐도 운전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정말요?”

 “네, 타이어의 마모 상태에 따라 고객의 운전 습관이나 성향을 미루어 짐작하곤 해요. 원래 타이어의 정식 명칭은 러버 휠(rubber wheel)이었다고 해요. 고무바퀴라는 뜻이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들 ‘타이어’라고 불러요. 왜일까요. 자동차 부품 중 가장 피곤한(tired) 게 타이어라는 거죠.”

 “아하, 재미있네요.”

 예, 그런데 운전하면서 자동차의 발에 해당하는 타이어를 참 피곤하게 만드는, 피곤한 운전자가 많아요. 운전에 ‘3급’이라는 게 있어요.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인데요. 이걸 밥 먹듯이 하는 운전자들은 성격이 삐딱하고 과격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이 끌고 온 차량을 살펴보면 아니나 다를까 타이어 상태가 엉망이라니까요.”


청년의 증언처럼, 사람 성격은 아주 사소한 데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건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고 즉흥적으로 변조할 수도 없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네 일상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과 삼라만상에 꽤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질은 다른 것과 잘 섞이지 않는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드러나곤 한다.


4) 프로와 아마추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뭘까?

 ‘프로’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 전문가)의 준말로, 그 어원적 뿌리는 ‘선언하는 고백’이란 뜻의 라틴어 프로페시오(professio)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들 앞에서 “난 전문가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그리고 그에 따른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해야 비로소 프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프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도 끝까지 해내는 경향이 있다. 그냥 끝까지 하는 게 아니다. 하기 싫은 업무를 맡아도 겉으로는 하기 싫은 티를 잘 내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마무리한다. 왜? 프로니까.

 이와 달리 ‘아마추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에서 유래했다. ‘애호가’ ‘좋아서 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취미 삼아 소일거리로 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마추어는  어떤 일이나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 같은 요소가 사라지면 더는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 입장에선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새삼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인지 모른다고.


5) 유머와 개그

 유머(humor)와 개그(gag)는 조금 결이 다른 개념이다. 개그는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끼워 넣는 즉흥적인 대사나 우스개를 뜻한다. 웃기는 게 유일한 목적이다.

 유머는 그렇지 않다. 익살과 해학과 삶의 희로애락이 적절히 뒤범벅된 익살스러운 농담을 의미한다. 유머 앞에서 우리가 왁자지껄 웃어젖히다가도 어느 순간 씁쓸한 눈물을 쏙 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머의 어원도 흥미롭다. 유머는 라틴어 우메레(umere)에서 유래했다. 물속에서 움직이는 유연한 성질을 지닌 물체를 지칭한다. 그래서일까. 적당한 유머는 삶의 경직성을 유연성으로 전환하고  획일성을 창의성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6) 빵을 먹는 관계

 회사를 뜻하는 단어 컴퍼니(company)는 com(함께)과 pany(라틴어로 빵을 의미)가 결합한 꼴이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작은 빵을 나눠 먹는 돈독한 관계로 풀이해야 제대로 된 해석이다. 음식을 권하면서 끼니를 해결하고 일상의 고단함과 온기를 공유하는 사이 말이다.

어떤 면에선 식구 같은 단어와도 맥을 같이한다.


7) 바람도 둥지의 재료

 작은 새 한 마리가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짓는 모습을 보았다. 녀석은 제 몸길이보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쉴 새 없이 운반하며 얼키설키 보금자리를 엮고 있었다.

 그때였다. 휙 하고 한 자락 바람이 불었다.  미루나무가 여러 갈래로 흔들리자, 녀석이 애써 쌓아 올린 나뭇가지에서 서너 개 가지가 떨어져 나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궁금했다. 녀석은 왜 하필 이런 날 집을 짓는 걸까. 날씨도 좋지 않은데...


 집에 돌아와 조류 관련 서적을 뒤적였다. 일부 조류는 비바람이 부는 날을 일부러 골라 둥지를 짓는다고 했다. 바보 같아서가 아니다.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는 튼실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내가 목격한 새도 그러한 연유로 흐린 하늘을 가르며 날갯짓을 한 게 아닌가 싶다. 나뭇가지와 돌멩이뿐만 아니라 비와 바람을 둥지의 재료로 삼아가며.


8) 리더(Leader)

 리더(leader)의 유래와  관련해 몇 가지 설이 있다.

 우선 리더는 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선봉에 나가 싸우는 사람, 먼지를 먼저 뒤집어쓰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선 리더를 ‘외로움’ ‘인내’  같은 단어와 동의어로 여겼다고 한다.


 다른 의견도 있다. 단순히 일행보다 앞장서서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여행하는 사람을 위해 장애물을 허물고 길을 개척하는 지도자, 즉 ‘여행을 이끄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라는 것이다.

 난 이 견해가 참 마음에 든다. 내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리더의 모습은 함께 여행하는 일행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는 자칭 타칭 리더로 불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고 권한과 책임 사이에서  심도 있게 방황하는 리더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뭐랄까. 다들 리드(lead)를 하겠다고 목소리만 높인다고 할까. 그들이 이 글을 리드(read)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9) 이름을 부르는 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리 하찮은 일이 아니다. 이름을 뜻하는  한자 명은 저녁 석에 입 구를 받친  구조다.


캄캄한 밤, 어둠 속에서 자식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부모가 목놓아 외치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상대방의 편안함과 위태함을,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가족이나 친구의 이름을 말할 때 욕지거리를 섞어 부르고 있다면, 그런 표현이 혀에 착착 달라붙는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름을 부르는 일은 숭고하다.

숭고하지 않은 이름은 없다.


10) 가능성

 무섭기로 소문났던 학생부 선생님은 혼을 내기는커녕 이면지 한 장을 꺼내더니 “여기에 네 장점을 써 보자”라며 당시엔 듣기 어려웠던 청유형 문장을 구사했다.

 칭찬과 지적이 적절히 혼재된 면담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너처럼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 그러면 안 된다”하셨다. 난 가능성이란 낱말이 참 듣기 좋았다. 내게 그 표현은 “아직 널 믿는다...”는 말로 들렸으니까.


 당당하게 교무실로 나서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람 보는 ‘눈’이란 건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능력이 아니라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것과, 가능성이란 단어가 종종 믿음의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을.


<책장을 덮으며>

누구나 따뜻한 대접을 받길 원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였을까?


소중한 사람들은 항상 곁에 있기에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오늘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하루의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사람.


그 사람들을 어떤 언어로 대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오늘은 어제보다 따뜻한 언어로 대해주는 것이 어떨까?


나의 따뜻함은 우리 모두를 따뜻하게 해 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