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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Aug 09. 2020

숲에게 길을 묻다

숲 속에 답이 있었다.

일이 힘든 시기가 있다.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는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숲을 걷는다.

숲을 거닐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해답을 얻곤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아침에 숲 속을 거니는 것과 같이,

삶에 대한 교훈을 건네주었던,

‘숲에게 길을 묻다’의 문구를 옮겨본다.


[숲에게 길을 묻다 _ 김용규 지음 _ 비아북 출판사]


1) 숙명 

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선택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태어나는 것’, 즉 ‘탄생’입니다.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날 수 있는 생명체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또 자신이 나고 싶은 자리에서 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진 생명체가 있을까요? 절대 없습니다. 나는 이것을 모든 생명체에 부여된 ‘탄생의 불가역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바꿀 수 없는 관계들을 포함하여 ‘숙명’이라고 정의합니다.


 혹시 그대도 살면서 태어난 자리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탄생의 불가역성이 가혹하다 생각한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퍽 오랫동안 그런 분노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숲의 생명체들이 걷는 길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숲 속의 식물들이 각자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제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숲은 그 생명체들이 숙명을 대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내 가슴을 차지했던 억울함을 씻어주었습니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대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아직 이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대라면 억울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조금 더 숲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보면 좋겠습니다. 숙명이 지천인 숲이라지만, 생명 각자는 발아한 그 자리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나는 아직 주어진 자리가 억울하다고 분노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2) 구조조정

 나무는 끊임없는 구조조정을 통해 성장합니다. 봄철에 씨앗에서 새싹이 나오는 장면을 살펴보십시오. 나무는 씨앗의 영양분을 활용해 제일 먼저 떡잎을 냅니다. 이 떡잎이 최초의 광합성을 담당하며 키를 키우고 다시 본잎을 만듭니다. 이제 떡잎은 사라지고, 본잎들이 더 힘차게 광합성을 합니다. 나무는 새로운 잎의 노동에 의지하여 점점 뿌리와 줄기를 키우고 넓히며 새로운 가지와 잎들을 만들어서 성장을 지속합니다. 그렇게 새롭게 시도하고 다시 버리는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5년, 10년, 100년, 때로는 1,000년 너머에 이르기까지 제 삶을 살아갑니다. 역할이 끝난 떡잎을 버리듯 나무는 병에 걸려 회생이 불가능해진 가지도 가차 없이 버립니다. 또한 광합성량보다 호흡량이 많아 나무 전체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가지도 버립니다. 나무는 한때 자신을 키웠으나 이제는 짐이 되는 가지들을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않음으로써 정리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유용보다 무용이 커진 부분을 실수나 실패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저 그렇게 무수한 잎과 가지와 줄기를 버림으로써 나무는 자신이 매 순간 조금씩  성장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숲 바닥으로 버려지는 수많은 시도들이 미생물을 만나 썩음으로써 다시 자신과 주변 생명체의 삶을 비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리라는 걸 나무들은 알고 있습니다.


3) 가시

 오래 자란 나무보다 어린 나무일수록 가시는 도드라집니다. 어린 나무는 꺾이고 부러지기 쉽습니다. 아직 그들의 줄기는 여린 상태입니다. 이때 줄기를 잃으면 자칫 자신의 앞길 전체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참 생장하는 어린 그들에게는 동물의 접근이 무척 두려웠을 테지요. 그들에게 가시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강력한 방어 수단인 것입니다.

 나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직 세상의 불합리에 맞설 힘은 갖추지 못했는데,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은 많았던 모양입니다. 부딪힐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상처였습니다. 정의라고 믿은 것을 향해 뻗었던 가지들은 하나둘 부러져 나뒹굴었습니다. 세상이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믿음에 내밀었던 새싹들도 대부분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좌절하면서 나 또한 뾰족한 가시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좌절이 깊어질수록 내 몸에 돋는 가시는 많아졌고, 또한 억세졌습니다. 어느 순간 나는 가시를 돋우고 사는 두릅나무의 모양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내게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여기저기 부딪히며 살았습니다.

 숲을 만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숲을 이불 삼아 살겠다며 산을 오르내리던 어느 날 두릅나무를 보며 알게 되었습니다. 문득 그 나무에 왜 가시가 돋아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들의 방어 수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가시를 달고 있는 나무들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깨달음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 가시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나는 가시를 떨어뜨린 나무들을 찬찬히 살펴본 후 그들이 가시를 버린 이유를 알았습니다. 즉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긴 나무들만이 가시를 버렸던 것입니다. 동물들에게 쉬이 꺾이지 않을 만큼 자신의 줄기를 살찌웠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동안 키워온 가시를 떨어뜨렸습니다. 자라면서 그들은 가시에 쏟아부었던 에너지와 양분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면 가시는 자연스레 삭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4) 경쟁

 오늘날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경쟁은 창조주의 뜻과 너무 다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생명을 지속하고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의 원리로 부여된 경쟁의 양상은 우리 인간의 숲에서는 빠르게 꺼져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나를 변화시켜 나를 실현하고, 그를 통해 더 풍요로운 생명공동체를 이루도록 고완된 경쟁의 원리, 그 건강한 경쟁의 긍정성은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누군가의 이익을 빼앗고 누르는 것으로 승리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배우면서,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경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칡덩굴의 방식입니다. 타자를 휘감아 오름으로써 내 삶을 꽃피우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입니다. 이런 경쟁이 심화될수록 곤궁해지는 타자가 늘어나고 공동체도 점차 쇠락해갈 것입니다. 흐름은 막히고 긴 순환의 고리도 서서히 짧아지다가 결국 멈출 것입니다. 마침내 승자의 존립 기반도 무너지겠지요. 결국 웃음은 실종되고 슬픔 만이 가득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품어야 할 경쟁의 자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숲의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경쟁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숲은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숲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요, 새로운 영역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핏빛 대지에서 영혼을 고갈시키며 앞을 다투는 경쟁이 아니라, 나만의 푸른빛이 가득한 공간에 서는 것. 감히 추한 욕망이 넘보지 못할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 타자를 파괴하여 내 하늘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낡은 나날을 부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천박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내고, 아름다운 경쟁으로 더욱 푸르러지는 세상을 그리워합니다. 오늘도 나는 이 숲에서 그날을 그리워합니다.


5) 질경이라는 풀

 질경이라는 풀이 있습니다. 질경이는 그 모양새가 참 보잘것없는 풀입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앉은뱅이 키에, 볼품없는 잎사귀. 꽃도 아주 작고 수수하여 눈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질경이는 여러 해를 사는 다년생 풀입니다. 주로 길의 가장자리나 빈 터 등 다른 풀들이 살기 어려운 자리에서 자랍니다.

 질경이는 주로 옥토보다는 비전박토의 척박한 땅을 골라 자랍니다. 왜 옥토가 아닌 박토의 땅을 골라서 자랄까요? 그것은 누구도 침범하기 힘든 자신만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들이 오가는 딱딱한 길. 대부분의 다른 식물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그 길 위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삶을 키워 종으로 유지하는 놀라운 모습. 그들은 버려진 땅 위에 자신의 영토를 열기 위해 힘겨운 진화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기름진 땅 위에는 수많은 다른 식물들이 뿌리를 뻗고 키를 키우면서 생존과 번식의 자리를 놓고 다툽니다. 질경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키에 보잘것없는 외모로, 큰 키의 식물들과 경쟁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큰 키의 풀들에게 자신의 삶이 갇히자 질경이는 과감히 불모지를 찾아 나섭니다. 딱딱한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씨앗을 퍼뜨리는 진화를 감행한 것이지요.

 딱딱한 길에 뿌리를 내리는 것도, 그리고 수시로 밟히고 차이는 여건에서 살아남는 것도 틀림없이 힘든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질경이는 그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비전박토의 자신의 터전으로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역을 닦고, 마침내 자유의 공간을 일구어냈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선택하여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질경이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자신을 밟고 다니는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녀석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의 숱한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 잎은 바닥에 납작 퍼지도록 진화했고, 또 질기면서 유연하여 갈라질지언정 꺾이지 않도록 변화해야 했습니다. 종자를 맺고 번식을 통해 대를 잇기 위해 씨앗도 척박함을 견디는 선택을 지속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씨앗은 아무리 밟혀도 찌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신발이나 바퀴에 붙어 멀리 퍼져나갈 수 있도록 변했습니다. 그들의 씨앗은 등산객의 신발에 붙어 산길을 따라, 오솔길을 따라 번식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합니다. 질경이는 그렇게 어려움을 기회로 바꾸는 지혜를 일궈낸 풀입니다.


6) 연리목

 연리목은 나무와 나무가 맞닿아 더 이상 비켜 설 곳이 없을 때 서로의 장벽인 껍질을 벗고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로 합일한 것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붙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나무껍질을 벗고 세포와 세포를 합치고 새로운 껍질을 만들어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살아갑니다. 세분하여 가지와 가지가 합일한 나무를 연리지, 줄기와 줄기가 합일한 나무를 연리목이라고 부릅니다.

 연리목을 이루는 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연리지가 되는 것은 연리목에 비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바람의 훼방 때문입니다. 가지와 가지가 맞닿아 하나로 합쳐지려 할 때 거센 바람이 불면, 줄기에 비해 가늘고 가벼운 가지는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수한 흔들림 속에서 서로가 합쳐지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야속한 바람을 넘어서서 끝내 합일을 이루어낸 것이 바로 연리지의 사랑입니다. 깊은 사랑입니다.

 그들의 깊은 사랑은 아픔을 거쳐 완성됩니다. 처음에는 서로 맞닿은 가지가 해마다 지름을 키우면서 서로의 접촉 부위를 심하게 압박할 것입니다. 서로는 점차 자신의 껍질을 벗게 되고 맨살을 맞대기에 이릅니다. 연리지나 연리목을 이루는 나무들은 모두 서로의 맨살 위로 새로운 살을 만들어 덮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무는 서로가 같은 종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무의 맨살에는 세포분열을 담당하는 형성층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서로를 깊이 확인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같은 종의 나무임을 확인했을 때 비로소 서로는 합일을 모색합니다. 다른 종끼리는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마침내 하나가 되면 그들은 세포를 연결한 채 물을 공급하고 빛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 자신의 살을 내어주지 않고는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로 합일한다는 것은 이렇게 살을 에는 아픔을 딛고 이룩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수백 년을 거쳐 이루게 되는 완성입니다.

사랑을 완성한 이들은 이제 한쪽 나무의 아래가 잘려나가도 다른 쪽 나무가 공급하는 영양분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하게 하나로 결합합니다.

 참으로 깊고 깊은 사랑입니다. 나는 옆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연리목을 보러 자주 갑니다. 그들의 사랑을 볼 때마다 ‘아, 이들이야말로 생명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리목은 우리에게 고결한 사랑은 자신들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합일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 말합니다. 둘을 합쳐 하나의 샐로운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정수라 말하는 듯합니다.


 이렇듯 사랑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때로 서로의 거죽을 벗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벗겨진 자리에 생기는 서로의 상처를 기꺼이 감사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세포와 세포까지도 하나로 결합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나의 살을 내어주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경지입니다. 우리가 연리목처럼 옆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나의 몸과 마음을 열고 세포의 칸막이까지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7) 큰오색딱따구리

 지난해에 섬진강변에서 ‘큰오색딱따구리’를 50일간 관찰하고 사진과 기록, 그리고 이야기로 담아 펴낸 김성호 교수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알을 낳으면 새의 가슴털이 동그랗게 빠집니다. 혈관이 집중되어 있는 가슴을 드러냄으로써 더 따뜻한 체온으로 알을 품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깃털이 빠진 부분을 포란반이라고 부릅니다. 포란반은 자식을 알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한 부모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자신의 털을 뽑아 자식을 품는 부모의 사랑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모든 자식은 언젠가는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를 관통하는 공통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날을 엄격하게 준비합니다. 이제 오색딱따구리 부부도 자식들과의 이별을 준비합니다.

 부모 새는 우선 먹이를 주는 횟수를 줄입니다. 그리고 새끼들을 조금씩 집 밖으로 유인합니다. 또한 부모는 홀로서기를 가르칩니다. 산란 이후 33일 동안 자신의 가슴털을 뽑아가면서까지 체온을 나누어왔던 새끼들에게 더 이상 체온을 나눠주지 않습니다. 같은 기간 내내 새끼들의 둥지에서 밤을 지켜왔던 아빠 새는 이별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새끼들의 둥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홀로 밤을 지내는 법을 새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에 담긴 김성호 교수의 관찰과 기록은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나는 이 새들이 자식을 낳고 기르고 떠나보내는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 우리가 자식을 대하고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 새의 자식 사랑이 보여주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어야 할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자식이 스스로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8) 부모의 품을 떠나보내는 자연

 자연은 자신의 새끼나 씨앗을 발아래 두려 하지 않습니다. 품을 떠나보내지 못한 새끼는 무서운 맹수나 맹금류를 피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 위태로울 것이고, 부모의 발아래에서 발아한 씨앗은 결국 부모의 그늘에 살면서 부모와 햇빛을 나누고 양분을 다퉈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스스로 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어찌 참다운 사랑이겠습니까?

 숲은 비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숲은 날로 깊어가는 법을 압니다. 굳이 날갯짓을 배우지 않아도 새가 스스로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를 수 있듯이 자연의 모든 생명은 이미 그 안에 스스로 자라고 익어가는 법을 품고 있습니다.


9) 숲과 낙엽

숲의 낙엽은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안식을 위해 치르는 의식의 산물이다.

동시에 낙엽은 숲 공동체가

서로의 삶을 부양하기 위해

내어놓는 저장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를 부양할 줄 안다.


10) 죽음

 오늘날 묘지 문제가 이토록 심각해진 원인을 나는 가난에서 찾습니다.

 떠나는 자의 영혼이 가난하면 묘지가 더 커지고, 더 견고해집니다. 보내는 자의 정신이 창백하면 장례와 묘지가 화려하고 웅장해집니다. 크고 화려한 묘지를 만들어 보존하려는 정신 속에는 그것을 통해서라도 자신과 자신의 뿌리를 과시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가난한 욕망입니다. 그들은 고인이 살아서 무슨 학위를 가졌고,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를 묘비에 기록하고 싶어 합니다. 묘지의 크기와 견고함과 화려함으로 그가 얼마나 큰 집에 살았고 얼마나 비싼 차를 탔는지를 현시하려 합니다. 입신양명한 것을 살아 있었을 때의 가장 큰 가치로 가리고 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묘지는 그의 영혼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반증하는 산물로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입니다. 사는 동안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에게 진 빚을 죽어서도 갚지 못하는 사람, 후손들의 자원이기도 한 땅을 지나치게 많이 오랫동안 차지하는 사람, 자신의 죽이 자신의 삶과 이별의 생명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끝내 깨닫지 못하고 떠난 사람으로 기록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무덤 앞에 서면 나는 무덤의 주인이 두려워하고 회피하다가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죽어가는 나무의 모습은 처연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에 그것은 오히려 담담하고 더러 풍성하기까지 합니다. 나무는 죽으면서 다른 생물들에게 수많은 혜택을 베푸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죽어 소멸해가는 나무들의 몸은 다른 생명들을 위해 베푸는 마지막 잔치와도 같습니다. 나무는 죽으면서 다른 생명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갑니다. 죽어가는 나무는 곤충과 애벌레에게 자신의 몸을 허락합니다. 곤충이 자신의 몸에 파고들어 집을 짓게 하고 그 안에 애벌레들을 위한 기숙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곤충과 그 애벌레들이 자신의 육신에 기대어 태어나고 자라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길러낸 그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하늘을 날며 온갖 풀과 나무의 전령사 노릇을 하게 함으로써 어디선가 자라고 있을 자신의 2세들에게 자신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헌납하는 것입니다.


<책장을 덮으며>

 집 뒤편에 작은 숲이 있다.

서울에 살며 쉽게 접할 수 없는 환경이다.

아침에 숲 속을 거닐면 아침 산의 기운을 얻는 듯하다.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아침 숲 속에서 듣는 새소리는

사회의 소음에 지친 귀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준다.


숲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숲은 항상 변하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숲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고 있다는 것이다.


숲을 거닐면 힘을 얻는다.

숲을 거닐면 해답을 찾는다.

숲에게 길을 묻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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