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닫다
2015년 겨울.
당시 나는 강원도의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 새벽 4시면 차를 몰고
강원도로 향했다.
겨울 새벽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며 제일 힘들었던 것은 졸음운전도 아니었고, 이른 시간부터 일을 하러 가야 하는 내 신세도 아니었다.
2시간 운전을 하면서 1~2차례는 마주치게 되는 로드킬의 현장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었고, 혹시라도 내가 그 현장을 정확하게 지나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운전을 해야 했다.
한 번은 도로관리요원이 로드킬 현장을 수습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 담력으로는 저 일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수 청소업을 하는 김완 작가는
조금 특별한 청소를 한다.
책 제목처럼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한다.
김완 작가는 본인의 일이 힘든 일인지에 대해,
“힘들지 않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죽은 자의 집 청소’를 통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이 소중해진 이유를 살펴보자.
건물 청소를 하는 이가 전하는 그녀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다. 그 착한 여인은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인 사람이 되어 생을 마쳤다. 억울함과 비통함이 쌓이고 쌓여도 타인에게는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고, 남에겐 화살 하나 겨누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향해 과녁을 되돌려 쏘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죽일 도구마저 끝내 분리해서 버린 그 착하고 바른 심성을 왜 자기 자신에겐 돌려주지 못했을까? 왜 자신에게만은 친절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오히려 그 바른 마음이 날카로운 바늘이자 강박이 되어 그녀를 부단히 찔러온 것은 아닐까?
합법의 울타리 안팎으로 흰 발과 검은 발을 한 발씩 담근 채 교묘히 넘나들며 채무자를 압박하는 자들. 달리 생각해보면 가족은 연락을 끊어도 채권자는 끊임없이 안부를 묻는 셈이다. 빚 있는 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은 혈육보다 오히려 채권자가 아닐까?
수십억 원대의 빚을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갚아나간다고 용기 있게 고백한 가수 출신의 방송인에게 채권자들이 건강보조식품을 보내주며 응원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마음이 복잡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때는 차라리 웃는 편이 나을까? 돌려받는 돈이 있는 자는 그 누구보다 빚진 자가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아 있길 바랄 것이다. 빚을 모조리 회수하는 그날까지.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가난과 외로움은 사이좋은 오랜 벗처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이 세계를 순례하는 것 같다. 현자가 있어, 이 생각이 그저 가난에 눈이 먼 자의 틀에 박힌 시선에 불과하다고 깨우쳐주면 좋으련만.
혼자 죽은 채 방치되는 사건이 늘어나 일찍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고독사 선진국 일본. 그 나라의 행정가들은 ‘고독’이라는 감정 판단이 들어간 어휘인 ‘고독사’ 대신 ‘고립사’라는 표현을 공식 용어로 쓴다. 죽은 이가 처한 ‘고립’이라는 사회적 상황에 더 주목한 것이다. 고독사를 고립사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죽은 이의 고독이 솜털만큼이라도 덜해지진 않는다. 냉정히 말해서, 죽은 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 편에서 마음의 무게와 부담감을 덜어보자는 시도이다.
이곳을 치우며 우연히 알게 된 당신의 이름과 출신 학교, 직장, 생년월일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그것은 당신에 대한 어떤 진실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치우면서 한 가지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이곳에 남은 자들의 마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던 사람입니다. 당신이 버리지 못한 신발 상자 안에 남겨진 수많은 편지와 사연을 그 증거로 제출합니다. 또 당신이 머물던 집에 찾아와 굳이 당신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 아버지와 어머니, 홀로 방에 서서 눈물을 흘리던 당신의 동생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그들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직 당신이 살아 있을 때 병에 걸려 고통받으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은 절대 잊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남긴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지워질 테지만, 당신이 남긴 사랑의 유산만은 누구도 독점하지 못하고, 또 다른 당신에게, 또 다른 당신의 당신에게 끝없이 전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부디 이 사실 하나만은 당신에게 전달되길 바라며, 모자라고 부끄러운 글월을 부칩니다.
당신이 머문 곳을 치운, 이름 없는 청소부 올림.
그 점에서 내가 하는 일도 식탁 치우기와 다를 바가 없다. 식탁 위에 차렸던 것을 주방으로 옮기듯 그저 집에 있는 것을 끌어모아 집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매일 지구 상의 모든 가정과 식당에서 일어나는 식탁 치우기는 내 일과 본질적으로 같다.
남은 음식을 치우는 일은 가볍고 쉬운 것, 죽은 사람이 남긴 육체 조각과 혈흔을 없애고 냄새나는 살림을 치우는 일은 무겁고 엄숙한 것이라고 누가 선을 그을 수 있는가. 특수 청소를 하는 것은 남다른 일, 특별하고 어려운 행위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대한 처치일 뿐 그 일 자체가 특별하지 않다.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을 누군가가 대신하는 것뿐.
여기 있는 모든 것이 특별하다고 말하면 어떨까. 지금 여기 모인 사람 가운데 특별하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 특별하다는 관념은 언제나 가치 없는 것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모든 것이 가치 있고 귀중하다면, 지금 여기에서 특별하지 않은 것이라곤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면 무척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 같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도, 성적을 비관하며 아래만 바로 보며 걷는 학생도, 수레를 끌며 엘리베이터 문에서 나서는 택배 배달원도, 커피 위에 우유 거품으로 무늬를 새기는 바리스타도, 승용차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는 거주민을 향해 일일이 거수경례로 배웅하는 경비원도... 어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특별하다고 말하면 어떨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고귀하다고, 그리고 내가 하는 이 일이 너무나 소중한 직업이라고....
당신이 하는 일처럼 내 일도 특별합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 귀중한 사람이 죽어서 그 자리를 치우는 일이거든요. 한 사람이 두 번 죽지는 않기 때문에, 오직 한 사람뿐인 그분에 대한 내 서비스도 단 한 번 뿐입니다. 정말 특별하고 고귀한 일 아닌가요?
“힘들지 않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내 대답인즉슨, 힘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힘들다고만 말하기엔 뭔가 꺼림칙한, 적잖이 즐거운 면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엔 즐거움으로만 가득한 노동도 없고, 오직 괴로움만으로 이루어진 직업도 없다. 나 같은 일을 하는 자에게도 즐거운 점 혹은 이점이 있으니 꽤 많은 이가 직업으로 선택하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얼마나 많은 변기를 닦아왔나. 변기 속엔 흔히 더럽고 냄새나고 끔찍한 것이 자리 잡고 들어앉게 마련이다. 똥이나 오줌 따위야 지당한 것이고, 술을 먹고 게워놓은 토사물로 가득한 변기, 지병을 앓다가 고독사 한 이가 발견된 집에서는 각혈로 피가 잔뜩 고인 변기도 흔히 만났다. 지상의 그 어떤 더럽고 난처한 것도 군말 없이 받아주는 한량없이 너그러운 존재가 있다면 바로 변기일 것이다. 나는 웬만해선 이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다.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도기용 광택제를 뿌려서 변기와 세면대를 천사장 가브리엘의 이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으로 하얗고 눈부시게 닦아놓으면 마음이 참 뿌듯해진다. 더러움이나 불쾌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엔 그저 순수하고 충만한 행복이 남는다.
어째서인지 인간의 마음도 더러운 화장실 청소처럼 얼마간 곤욕을 치르고 나면 잠시나마 너그러워지고 밝아진다. 평소 우울감에 시달려 단순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화장실 청소를 추천하고 싶다. 그 화장실이 더럽고 끔찍할수록 더 좋다.
수도꼭지의 아이러니는 누군가가 씻는 데 도움이 되고자 만들어졌지만 결코 스스로 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집이라면 그가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가서 군말 없이 치우는 것이 제 일입니다만 정작 제가 죽었을 때 스스로 그 자리를 치울 도리가 없다는 점이 수도꼭지를 닮았습니다. 언젠가 죽은 이가 숨을 거두고 한참 뒤에 발견된 화장실에서 수도꼭지에 낀 얼룩을 닦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아이고, 죽겠다.”
힘든 일을 할 때, 우리가 쉽게 내뱉는 말이다.
하지만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을까?
모든 생명은 가치가 있다.
하지만 모든 죽음은 그 가치가 다르다.
어떤 죽음은 세상의 빛이 된다.
반대로 어떤 죽음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상처만을 남기기도 한다.
태어나는 것은 누구도 본인이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은 누구나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어떤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나의 떠난 자리는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는가?
또는 어떻게 떠나가길 원하는가?
자연의 순리대로 떠나가되,
나의 길을 따라오는 이들에게
좋은 뒷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한다.
인생을 마지막을 생각하며,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해 본다.
죽음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 나니,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