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퇴직이 필요하다
날마다 퇴직을 꿈꾼다.
퇴직은 못하고 퇴근만 하고 있다.
매일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
‘퇴직’
퇴직을 생각하고 있는 마음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책,
‘무작정 퇴사하지 않겠습니다.’의 안목을 적어본다.
“퇴사해도 될까?” 불합리한 연봉, 피곤한 인간관계, 고된 업무 등 퇴사해야 할 이유는 많다. 세상은 독립의 시대와 고용의 종말을 논하며 회사 인간의 가난한 마음을 부추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아직 퇴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한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나를 돌아보지 않았고, 충분히 버텨보지 않았다. 일도 사람과 같아서 직접 경험해봐야 알고, 어느 정도 고비를 넘겨봐야 진가가 드러난다. 취업난에 휩쓸렸던 입사 때처럼 상황 대응에 급급하면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진짜 퇴사해도 되는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용히 준비를 마치고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난다. 선택권을 외부에 넘기지 말자. 조급할수록 여유를 두고 전략을 짜야한다. 시간이 들더라도 당신이 주체가 되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처음부터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해서 전문 영역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사회에 긍정적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천직을 만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것이 ‘계획된 우연 이론’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스탠퍼드 대학의 크롬볼츠 박사는 성공한 사람 중 80퍼센트가 지금의 성공을 목표하거나 계획했다기보다는 그냥 주어진 현실 속에서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결과를 통해 계획된 우연 이론을 주장했다.
크롬볼츠 박사의 이론은 예측 불가능한 인생에서 우연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한다. 그중 하나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 계획을 수정할 수 있는 ‘유연성’이다. 인생은 계획의 영역이 아니라 대처의 영역이다. 삶은 언제나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앞날은 알 수 없다.
무대나 공연이 좋다고 연극에 뛰어드는 사람이 많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 호흡하며 커튼콜 때 박수를 받는 것은 배우라는 작업의 일부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를 손보고 밤새도록 역할을 고민하며 매일 똑같은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은 배우의 더 큰 일상이다. 연극할 때 극단을 이끄는 선배가 나같이 이제 막 시작한 후배들을 모아놓고 한 말이 있다.
“내가 여기 있는 너희들 누구보다 이 일을 오래 할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
당시에는 크게 수긍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보니 정말 그녀 말대로였다. 끝까지 남아 진짜 배우가 된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면 핵심 조건이 있다. 포기하지 않는 것. 열정보다는 ‘꾸준함’을 기억해야 한다.
“후배들 교육하다 보면 많이 듣는 이야기가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거야. 대체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게 뭐지? 처음부터 회사에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아.”
친구는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일을 포기하는 후배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내 친구처럼 좋아하는 일은 직업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사이에서 고민 중이라면 좋아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럴 때는 당장 밥벌이에 유리한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부수적으로 계속해나가는 것이 좋다. 회사를 다니며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해본다.
생업 외에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좋아하는 일을 주업으로 하고 싶다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실력을 쌓아가야 한다. 직접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참여해보자. 동호회에 가입하거나 관심 있는 주제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정보를 공유해도 좋다.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 급할 것도 없다. 꾸준히 하다 보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만큼의 수준으로 도달할 수도 있다. 그때 일의 비중을 조절하는 것이다. 잘하는 일의 비중을 줄이고, 좋아하는 일의 비중을 늘린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일이 생업이 되기 전까지 검증하는 단계를 거쳤다. 이렇게 시작한 제2의 직업은 가능성을 검증받고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실패가 거의 없다.
취업할 때 궁금한 것은 ‘회사’와 ‘일’이다. 극심한 취업난에 원서 넣기도 바쁜데,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볼 여력이 없다. 일에 대해 유난스러웠던 나도 그랬다. 삶에 어마어마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일을 정말 잘 고르고 싶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4학년이 듣는 취업설명회에 참여했고, 전문직 선배가 와서 취업 강의를 한다고 하면 따라가 들었다. 나와 잘 맞는 일을 찾겠다는 목표에서 맞춰야 할 대상은 ‘나’인데, 그저 보편적으로 좋은 일에 대해 알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퇴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회사에 대한 불만, (매번 부딪히는) 상사 및 동료에 대한 분노, 더 나은 조건 등을 곱씹기에 앞서 ‘나’를 돌아봐야 한다. ‘나’는 일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를 푸는 해결의 실마리다. 고단한 일터 안에서 지칠 대로 지쳐 나아가기 힘들다면 잠시 숨을 고르자.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불안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 불안한 상황과 마주쳤을 때 삶의 태도를 서서히 변화시킴으로써 내 안의 불안을 조절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예측성이 높아질수록 불안은 감소한다. 너무 먼 미래를 바라보지 말고 생각을 단순화해보자. 불완전한 상황은 통제하려 하지 말고 흘려보낸다. 삶은 원래 불완전하다. 나는 완벽할 수도 없으며, 완벽할 필요도 없음을 인정해야 감정의 그릇이 넓어진다.
다행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웅크린 자세를 펴고 걸어 나오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내적으로 강하고 평온한 사람은 삶에서 만나는 장애물을 유연하게 뛰어넘을 수 있다. 그들은 일이 주는 기쁨 또한 자주 맛본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이상주의자처럼 보인다고 해도 후자를 택하고 싶다. 설령 삶이 공평하지 않다거나 불합리하다고 하더라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개 퇴사를 결심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람의 말이다. 장자의 <인간세>를 보면 간사스럽고 편파적인 말이 사람의 분노를 산다고 한다. 지나친 아부와 지나친 비판이 난무하는 회사 안에서 때때로 내가 분노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밥그릇이 걸린 일터에서 바른말 고운 말만 오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덜 분노하고 덜 상처 받도록 더 단단해지는 수밖에. 회사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존감 장착이 필수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주변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매일 똑같은 출퇴근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업무, 특별할 것 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은 지루하다. 그러나 반복해서 계속한다는 것은 삶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는 데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어떻게 그 높은 산을 정복했느냐는 질문에 “한 발 한 발 걸어서 올라갔다”라고 답했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은 이렇듯 간단하다. 반복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그 반복이 삶을 채우고 나를 이끌어간다. 매일의 부딪힘 속에서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변화와 성장을 의미한다.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쉬운 데 반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해야 할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더 많은 기회를 만날 수 있다. 또 한 번 가슴 뛰는 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매일을 울상으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재미나진 않지만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려고 노력해볼 것인가? 확실한 것은 걱정 가득 찡그린 얼굴을 한 사람에게는 기회가 잘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담담한 오늘 속에서 되레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평소 한 걸음씩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면 그것이 기회라는 점. 정말 열심히 해봐야 할 순간이란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기회는 일상을 성실하게 보냈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언제쯤 멋지게 이 멘트를 날릴 수 있을까? 퇴사는 직장인의 로망이다. 과감하게 사표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승자이자 용자가 되었다. 무조건 견디면 바보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런데 사표를 던질 수 ‘있는’이란 표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나갈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무조건 버텨서도 안 되지만, 무조건 나가서도 안 된다. 해볼 만큼 해본 걸까? 먹고사니즘에 나가떨어져 퇴사를 결심했다면 결정을 잠시 보류해야 한다. 해볼 만큼 해봐야 현 직장의 진가가 드러난다. 퇴사의 시대. 직장인 대부분이 이직이나 퇴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시대에 내몰리지 않았더라도 길을 걷다 보면 방향을 전환해야 할 때가 온다. 문제는 언제 하느냐와 어떻게 잘하느냐다.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가 아니라 ‘역량을 잘 써줄 수 있는 회사’를 찾는다는 말이 와 닿았다. 그는 사회 초년생의 입사가 자유연애라면 지금은 맞선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원하는 것과 가지고 있는 것이 맞아야 서로 행복해질 수 있는 관계.
“맞아요. 이런저런 사람 만나보며 알아가기보다는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후 같이 성장해야 할 단계죠.”
지난 10년 덕분에 앞으로의 10년을 함께 하고픈 회사를 찾는 데 여유가 생겼다. 몇 군데 회사를 거치며 마음에 안 드는 곳도 있었을 테고, 힘든 시기도 겪었을 테다. 하지만 내면은 더 단단해져서 다음 회사를 고를 때도 남들과 똑같은 기준에서 나아가 스스로의 선택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그릇을 키워야 한다. 무슨 일을 잘할지, 어떤 업무에서 재능을 발휘할지는 해봐야 안다. 나에 대한 파악도 덜 된 상태에서 딱 맞는 곳을 찾기란 어불성설이다. 이때는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이 좋은 회사다. 일 잘하는 상사와 훌륭한 시스템을 통해 배우면 좋겠으나, 최악의 상사와 고된 환경이더라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을 상대하는 법,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법, 내가 싫어하는 것, 앞으로 피하고 싶은 것 등등.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회사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회사가 원하는 일의 차이에서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회사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회사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알게 된 것도 좋다.
회사 생활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준비할 수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잘할 수 있도록,
착실하게 퇴직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작정 퇴사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