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인사 Dec 25. 2019

사무실 케비넷 위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라떼는 말이야 - #6. 첫여름휴가를 아침 06:30에 간 사연

새벽 3시.

정말 쓰러지게 졸리다.

분명 오늘부터 나는 휴가를 즐기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회사에 있다.

그것도 새벽 3시에.

나 홀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군대에서 당직근무를 했을 때도 항상 꼬박꼬박 눈을 붙였다.

첫 당직 때는 당연히 말똥말똥 거리는 눈으로 당직근무를 할 줄 알았지만,

새벽 2시가 넘어가자 이내 나는

나의 무거운 눈꺼풀에 항복을 했다.


그런 내가

휴가 첫날 새벽 3시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입사하고 1년 만의 첫여름휴가.

연차휴가 따위는 안드로메다 어딘가로 보낸 지 이미 오래였고.

그나마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갈 수 있다는

여름휴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부장님부터 시작된 여름휴가는

매주 차수가 지속되면서

마지막 8 차수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전에 다니던 회사는 매주 화~금요일, 총 4일의 여름휴가를 제공했다.

월요일이 휴가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각 휴가자 간의 인수인계도 하고,

월요일에 각종 회의가 많은 것을 감안한

회사의 배려(?)랄까.


월요일. 7 차수 휴가를 다녀오신 대리님께서 출근하셨다.

"대리님~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하하하."

대리님이 휴가를 다녀오셔서 좋아 보이시는 것인지?

내가 내일부터 휴가라서, 내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무튼 그렇게 콧노래 절로 나오는 하루를 보내고,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야, 책인사!" 로 시작된 털림의 시간.


"너 이거 왜 안 해 놨어?"

"너 이거 지난달에 하기로 한 거 아니야?"

"너 이거는 왜 틀렸어?"

"너 이거는 왜 하다 말았어?"

1시간을 탈탈 털리다가 마지막 비수를 찌르는 한 마디.

"너 이러고도 휴가 갈 생각을 하고 있냐?"


아 C... 너란 인간.

(당시 대리님, 미안합니다. 글을 쓰다 보니 잠시 옛 기억에 울컥했습니다. ^^;)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 친구한테,

휴가 전격 취소 문자를 보내야 하나?

(카톡이 없던 시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리님은 큰 결정을 했는지,

부장님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야, 그냥 휴가나 가! 아주 휴가 갈 생각에 회사는 1도 생각 안 하지?"

그리곤 다들 저녁식사하신다고 가버리셨다.

"밥 먹고 오기 전까지 퇴근해라. 괜히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응? 분위기는 님께서 이상하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만...)


일단 퇴근했다.

근데 서러웠다.

집에 와서도 휴가를 갈 기분이 나지 않았다.


밤 10시.

회사를 다시 나갔다.

역시. 모두 퇴근하고 사무실은 컴컴하게 불이 꺼져 있다.

분명 저녁 먹고 와서 일한다고 했지만,

순댓국에 소주 한 잔씩 하시고는

"내일 할까?" 하곤 다들 들어가셨겠지.


컴퓨터를 다시 켰다.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탈탈 털린 리스트를 꺼내 들고,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기 시작했다.


'지난달에 하지 말라며?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하라며?

다음 달까지만 하면 된다며?'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온갖 생각들을 주워 담으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1시 반.

1차 위기가 왔다.

믹스커피 '라떼는 말이야' 한 잔에 기운을 얻는다.

다시 시작한다.


새벽 3시.

2차 위기가 왔다.

이제는 대리님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다.

잘 곳이 필요하다.

10분만 눈을 붙였으면 좋겠다.

의자는 싫었다.

누워서 딱 10분만 자고 싶었다.


사무실 안을 두리번두리번거리며

누워서 눈을 붙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오 마이 갓.

이렇게 좋은 자리가 있다니.

왜 그랬는지 지금도 미스터리 하긴 한데,

나는 사무실 케비넷으로 올라갔다.


사무실 케비넷은 2개씩 짝을 이뤄,

부서와 부서 사이의 파티션 역할을 해주며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신발을 벗고 케비넷 위로 올라갔다.

고된 몸을 케비넷 위에 뉘었다.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얼마나 놀랐을까?

불이 모두 꺼진 새벽 3시에 신입사원이 케비넷 위에 올라가 누워 있는 모습이란...)


딱 20분 정도 잤다.

정말 푹 잤다.

케비넷의 기를 얻고 자리로 돌아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 06:20.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서야 한다.

한 여름에도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회사에

나는 반팔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다.

(양심상 바지는 긴바지 입었다.)


무엇보다 10분 뒤면

하늘보다 높은 임원분들이 출근하실 시간.


서둘러 대리님께 메일을 보낸다.

"대리님. 말씀하신 것들 중에 이거 이거 이거는 했습니다.

다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휴가 다녀와서 마무리하겠습니다."


06:30.

경비반장님의 격려(?)를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저기 멀리 전무님의 그렌져가 보인다.


밤새 놀고 집에 가는 20대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간다.


나의 첫 번째 휴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사무실에서 뛰어다닌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