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교수님의 책 읽기를 하던 중,
최재천 교수님을 포함한 12명의 석학들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인을 읽는다‘를 읽었습니다.
책 제목은 ‘한국인을 읽는다’이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이야기들을 옮겨봅니다.
콩 20kg 한 자루면 20명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고기로 생산하면 1kg밖에 만들지 못해요. 기껏 한 사람 분량의 식량입니다. 그리고 육류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린 돼지나 소를 길러서 도살장으로 데려올 때까지 발생하는 메탄가스나 축산 폐수 같이 환경에 부담을 주는 부분을 생각해 보면 육류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식재료인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많은 곡물을 해외에서 수입해서 가축을 기를 때, 그 곡물을 수입하지 못한 개발도상국 등에서는 어린이와 여성들이 굶게 되거든요. 우리는 다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을 처리하는 데 비용이 드는데, 반면 다른 어딘가에서는 먹지 못해 굶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결국 크게 보면 한쪽의 잘못된 식문화가 다른 한쪽에 기아를 유발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현대 지구촌의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의식이라 생각합니다.
이스터 섬은 칠레에서 서쪽으로 3,600km 떨어진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 입니다. 이 선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서기 약 400년 전에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배를 타고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입니다. 잘 살다가 서기 1000년에서 1600년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해서 문명이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명이 멸망하면서 남긴 흔적들이 있는데 그중에 유명한 것이 거석인 ‘모아이 석상’입니다. 높이 10m 이상, 무게 50t 이상의 석상들을 남겼는데, 이 문명이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섬의 호수에 있는 퇴적층의 꽃가루를 분석해 보니 어느 시점인가 되어서 나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거죠. 왜 나무가 줄어들었는지 분석해 보니까 사람들이 나무를 잘라내고 그걸 활용해 돌을 운반해서 거석을 만들고 또 자기들끼리 싸워대고 이념이 다른 지역 간의 갈등이 커지면서 분쟁이 발생하게 된 거죠. 그것이 문명, 환경에 악영향을 주면서 점점 섬의 문화가 해체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게 이스터 섬의 사례인데요.
지구를 ‘마더 네이처’라고 하며 어머니 같다고도 말하는데, 사실 지구는 하나의 폐쇄된 시스템입니다. 섬이나 지구나 별반 다르지 않아서 지구 전체에 80억 가까이의 사람들이 부담을 주게 되면 어느 순간 지구가 견딜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되고, 그 징후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기후 위기라든지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는 거죠.
“우린 보통 자연하면 아주 순수함을 떠올리는데, 반대로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
다윈 이래 가장 위대한 생물학자라고 칭송받던 영국의 ‘윌리엄 해밀턴’ 교수의 말인데요. 윌리엄 해밀턴 교슈의 이론을 리처드 도킨스가 책으로 만든 것이 <이기적 유전자>입니다. 그 교수의 논문이 대개 수학 공식으로 되어있어 일반인은 못 읽으니까 도킨스가 많이 풀어준 셈이에요. 그런데 해밀턴 교수는 수학만 잘했던 게 아니라 되게 문학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 어려운 과학 논문의 문장을 읽어보면 문학적인 표현이 거침없이 나오죠. 그 글의 원문은 ‘nature abhors pure stands’입니다. 그걸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라고 번역을 했는데 실제 뜻은 ’자연은 절대 순수해지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우리가 자연을 순수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얘기하는 순수함이라는 건 다양성이 쏙 빠지고 한 가지로 남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연은 시간을 주면 끊임없이 다양화하지 절대로 다양성을 줄이는 일은 하지 않거든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알파, 베타 등 변이가 계속 생기는 거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 다양성을 줄이는 동물이 딱 하나 있어요. 인간이죠. 인간은 다양성을 못 참는 것 같아요. 말로는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삐딱한 소리 한마디만 하면 다 째려보잖아요. 우리는 반드시 한 목소리를 내야 하고 일사불란해야 마음이 편하죠.
와인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매년 우리는 포도나무를 심고 그 포도나무의 열매로 와인을 만드는데 어떤 곳은 기후가 좋고 어떤 데는 기후가 나쁘고 또 어떤 곳은 굉장히 토양이 척박하고 또 어디는 토양의 질이 좋듯이 다 환경이 다르죠. 그런데 굉장히 유명한 와인, 흔히 말하는 비싼 와인들의 공통점은 다 척박한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척박한 환경을 뚫고 자란 포도 열매의 강렬한 생명력을 응축하여 와인을 뽑아낼 때 정말 훌륭한 와인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환경을 탓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본래 타고난 것을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거죠. 또 좋은 기후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와인이 만들어지지는 않아요. 좋은 조건과 환경이라도 와인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수많은 종류의 와인이 나올 수 있거든요.
요즘에는 온라인에서 타인을 욕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을 즐기는 풍조가 있잖아요. 일반적으로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비를 맞는다고 해서 우리는 소나기를 원망하지는 않거든요. 내가 우산을 챙기지 못한 것, 내가 미리 날씨를 확인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죠. 그렇듯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기인한다는 생각, 나에게서 먼저 원인을 찾아보는 태도가 필요하고 그것의 시작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것이 인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론다 번’이라는 영화 제작자 겸 저널리스트가 쓴 책(=시크릿)인데요. 자기 자신을 감싸는 많은 기운 가운데 좋은 기운을 끌어당겨서 제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고, 저도 조금씩 연습을 해봤어요. 꼭 좋은 기운을 가지고 오는 건 아니더라도 같은 상황을 어떻게 좋게 해석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거죠. 달라이 라마가 한 말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어머니를 잃었습니다’라고 했더니 어머니를 잃은 게 아니라 어머니가 저승에 가서 당신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데요. 저도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한테 ‘엄마, 나 좀 도와줘, 힘들어’, 나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아, 엄마도 같이 기뻐해줘‘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면 어머니를 잃은 게 아니라 또 다른 제 응원군을 얻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어학 수업 중에 굉장히 충격을 받은 말이 있는데, 의학 용어로 사망을 ‘expire’라고 한다는 거예요. ’폐기 처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거죠. 그런 단어 사용도 의사가 냉정해지기 위해 죽음에 대한 감정적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해요. 한국 사람들이 어쩌면 죽음에 둔감해지기 위해서, 되려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때 ’죽겠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정신과 의사인데요. 삶의 말기에 있는 분들을 인터뷰하고 연구한 자료를 엮은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책에 사망의 5단계가 나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감정변화 5단계 중 첫 번째는 부정이죠.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하는 거고요. 이 시기를 지나게 되면 분노가 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착하게 살아왔는데’라며 화가 생길 수 있고요. 또 그게 지나면 타협을 하게 됩니다. 자신과의 타협 또는 의사와의 타협일 수도 있지요. 이번 한 번만 살려달라는 식으로 말이죠. 침체와 절망을 4단계로 보고요. 이걸 넘어가게 되면 수용이라고 해서 받아들이는 거죠. 이를 죽음의 5단계라고 하는데요. 이건 순서대로 모든 사람한테 오는 건 아니고요. 1, 2단계에서 멈추는 사람도 있고, 3단계에서 멈추는 사람도 있고 단계를 뛰어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 암학회에서는 이를 좀 더 세분화해서 7단계로 나누기도 하는데요. 맥락은 비슷합니다.
보통 대부분 사람들의 부고는 아들딸이 쓰는데요. 외국의 부고를 보면 ‘굉장히 사랑했던 엄마’, ‘파이를 잘 구웠던 아빠’ 그리고 ‘나를 사랑해 줬던 누구’라며 자식들이 써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 교수 부친상’이런 식이잖아요. 죽은 당사자는 온전히 없어지고 또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사라지죠. 자신의 부고를 직접 써보고 외국의 부고를 한번 참고해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일지,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꼭 부고랑 유서는 한 번씩 써보라고 권합니다.
유대인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불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 남성은 만 13세 때, 여성은 만 12세에 성인식을 하는데요. 그때 부모나 친척들에게 큰돈을 받습니다. 친척들은 마치 자기의 재산을 상속한다는 의미에서 큰돈을 줘요.
큰돈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액수인가요? 한 백만 원 단위입니까 천만 원 단위입니까?
서민 자녀들은 성인식이 끝나면 평균 6만 달러 정도가 모이고요. 잘 사는 집의 아이들은 몇십만 달러가 모입니다. 유대인들은 13세가 넘으면 완전한 성인의 권리를 갖습니다. 그래서 성인식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행사예요. 그렇게 큰돈을 받은 뒤에 부모들의 지시를 받지 않고 친구들과 의논을 해서 분산투자를 합니다. 주식과 채권 심지어는 부동산과 적금 이렇게 포트폴리오를 짜서, 부모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돈을 불리기 위해 돈의 흐름과 경제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친구들과 의논하면서 ‘지금은 활황기니까 주식의 비중을 높여야지, 지금은 불경기로 진입하니까 채권 비중을 높여야지‘하며 스스로 판단하면서 자기 돈을 불려 나가죠.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취직할 것인지, 자기가 불린 돈을 갖고 창업을 할 것인지, 선택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창업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면 이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요. ‘돈을 번다’는 개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죠. 그런데 유대인은 이미 13세부터 돈을 불려 왔기 때문에 그들은 ‘돈을 불린다’는 개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평생 동안 어떻게 돈을 불릴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죠. 그러니까 돈에 대한 시각과 개념이 우리의 생각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만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면, 우리의 안목이 높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2명의 석학 분들께서 역사적으로, 세계적으로 유용한 지식을 소개해 준 책입니다. ‘한국인을 읽는다’이지만,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 한국인의 미래를 위한 세계사에 대한 안목을 제공해 준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더 나은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 고쳐야 할 사항들을 알게 해 준,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 알고 있으면 좋은 이야기들을 알려준 의미 깊은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