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서받는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세.
배우 김혜자 님의 '생애 감사해'를 읽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엄마 같은 미소로 연기를 선사하는 김혜자 배우는 감사함의 대상을 '생'이라는 범위로 확장했습니다. 배우로서의 삶을 감사하고, 팬들의 사랑을 감사하고, 본인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에 감사하는 김혜자 배우의 감사한 이야기들을 적어봅니다.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며 모두 반대했지만 아버지(김혜자의 부친 김용택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2호 경제학박사이며, 미군정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는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명한 배우의 한마디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다. 찰리 채플린을 봐라. 웃기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아니? 좋은 배우가 되거라. 좋은 배우가 되면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처럼 세상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라.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라."
나는 방송국에서 가장 조용한 곳을 찾아다닙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면 뉴스룸이 가장 조용합니다. 방송하지 않을 때는 그곳이 작고 깜깜하니까, 아주 피곤하면 혼자 들어가서 20분 정도 잡니다. 그러면 밤새 잔 것보다 더 개운해지고 머리가 맑아집니다. 내가 그곳에 있는 줄 아무도 모릅니다. 내 나름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전원일기'에서 예쁘게 나왔습니다. 잠깐 자고 일어나서 뽀얗게 돼서 연기하곤 했습니다.
어느 프랑스 학자가 "신인 배우는 몸을 보여 주지만 스타는 영혼을 보여 준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배우가 영혼을 보여주는 연기를 할 수 있으려면 주제를 끌고 나가는 좋은 대본과 뛰어난 감독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배우가 무엇을 시도하고 싶어도 그 두 가지가 받쳐 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누군가 말했다고 합니다.
"미끄럼틀 꼭대기에 서서 내려갈 것인지 말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는 아이가 되어선 안 된다. 그저 타고 내려가야 한다."
매니저가 결정해 주기를 기다리며 계속 고민하고 있어선 안 됩니다. 자신이 직접 타고 내려가야 합니다.
"가르마 반듯한 머리가 얌전하시고, 맵시가 날씬하시고, 왼손 손톱 한 개가 짜개지신 양반이에요. 우리 어머니 좀 바꿔 주세요. 못 찾으면 소식이라도 좀 전해 주세요. 막내딸 은심이가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산다고. 아무 걱정 마시라고, 그 소리 좀 꼭 전해 주세요. 향남리 사시던 울 어머니 감실댁이요... 은심이가 꼭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깜깜한 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추운 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어머니 계신 데가..."
(중략)
사실 그 장면은 김정수 작가가 나를 위해 써 준 것입니다. 그때가 실제로 나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대본 연습 시간에 그 얘기를 듣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어서 넣어 준 장면입니다. 그만큼 배우들이 하는 말 한마디도 허투루 듣지 않고 대본에 반영한 작가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품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한테 용서를 빌 만큼 잘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못한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에게든 신에게든 내가 다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공연을 할 때는 관객을 잘 볼 수가 없습니다. 무대에서는 객석이 그냥 뿌옇게만 보이는데, 하루는 맨 앞자리에 앉은 관객 한 명이 얼굴이 무척 하얀 분 같았습니다. 그런데 공연 내내 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연기를 잘 못하나,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자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을 감고 대사를 음미하고 있는 게 아니라 보름달같이 둥근 얼굴을 뒤로 젖힌 채 자고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나, 그 사람 때문에 연극 망쳤어."라고 했더니 스태프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가장 좋은 표를 사서 맨 앞자리에 앉았어요. 얼마나 선생님을 보고 싶으면 그렇게 했겠어요? 그런데 하루 종일 얼마나 힘들게 일했으면 잠들었을까요?"
그 말을 들으니까, 정말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불평할 게 없습니다. 다 감사합니다.
봉준호 감독이 내 눈에 대해 말한 적 있습니다.
"김혜자 배우를 가까이서 많이 봤는데 눈이 정말 신기하다. 부드러운 안광이 나오면서 옛날에 순정만화 보면 여주인공 눈 속에 은하수가 있지 않나? 그것의 실사 버전을 보는 기분이다. 얼굴에서 차지하는 눈의 면적이 정말 크다. 찍다 보면 계속 다가간다. 자꾸 앞으로 가니까 나중에는 CG로 지우기도 했다. 눈이 너무 맑아서 촬영감독이 동공에 비치더라... 영화의 역사 중에 클로즈업의 역사가 있는데, 김혜자 배우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분이다. 클로즈업을 본다는 것은 얼굴도 얼굴이지만 눈을 본다는 얘기인데, 일단 시각적으로 두 분이 압도하는 부분이 있다. 눈이 보여 주는 깊이나 표정이 여러 대사를 할 필요를 없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분이다."
'다시다'는 '입맛을 다시다'에서 따온 순우리말입니다. "그래, 이 맛이야."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다시다 광고가 크게 히트하자,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제품 광고에 출연해 달라며 훨씬 많은 모델료를 제시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아무리 돈을 받고 하는 모델이라도 이 회사 모델을 했다가 다음 해에 경쟁사의 모델을 하는 건 소비자들을 기만하는 일이에요."
그렇게 거절했습니다.
김혜자 배우의 연기는 솔직하고 담백합니다. 꾸밈이 없고, 기교가 없습니다. 오로지 담담하게 배우로서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연기합니다. 그 점이 많은 사람들이 김혜자 배우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연예인들은 자신을 포장합니다. 더 좋은 사람, 더 멋진 사람으로 자신을 감춥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포장이 벗겨지면 많은 연예인들은 몰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김혜자 배우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갑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값비싼 자동차를 사거나 장신구로 치장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후배 배우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습니다. 나이 어린 감독, 연출자, 작가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이 보이는 곳에서 자신을 과시할 때, 김혜자 배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의 씨앗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솔직한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김혜자 배우를 존경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은 김혜자 배우가 직접 집필하였다기보다는 김혜자 배우와 관련된 글과 자료를 정리한 책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이 이미 다양한 경로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어진 책이기에 그 어떤 방법보다 김혜자 배우의 감사한 마음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인생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비록 성별은 다르지만, 저 또한 김혜자 배우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와 같이 순수하고, 생에 감사한 마음이 얼굴에 비칠 수 있도록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겠습니다. 지나온 삶과 앞으로 이어질 삶들이 눈이 부시도록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