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말들의 세상, 꿈꾸는 말들의 향연
교사를 보호하는 일의 영향에 관하여 / 김 민 휴
0.
이 글은 처음에 학생과 교사에게 발생한 비극적 사건에 대한 분노와 우울감으로 시작했지만, 평소에 머릿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글로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이 많으므로 각을 세워 핵심을 정하고 집중하여 글을 쓰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한 자리에 말하게 되어 내용이 좀 길고 벌려져 있다. 읽는 이의 수고를 바란다.
1. 상호부조의 실종
아직 자기를 보호할 수 없는, 오직 보호받아야만 할 어린 생명이 가장 보호해주어야 할 선생님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랬을 리가 있을까, 그럴 수가 있을까, 이런 일까지 일어나는구나. 부정, 분노, 수용, 우울…*주1). 마음이 비바람 치는 밤의 헐렁한 유리창문처럼 덜컹거린다. 깊은 샘물 밑 같은 낮은 곳으로 마음이 하염없이 가라앉는다.
어린이와 노약자 등 연약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이웃으로부터, 학교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같은 공간 속에서 접하고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거리에서 지나치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가.
안전과 안주가 불확실하여 사회가 의심스럽고, 자꾸 위험이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는 감이 들고, 이런 환경에 나와 내 가족이 노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수시로 떠오르면 일상은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인간사회에서 상호 보호는 공기와 같다. 굳이 의식하면서 살지 않지만, 공기가 없다면 잠시도 살 수 없듯이 사람 간의 상호 보호가 없다면 사람의 처지는 굶주린 맹수의 우리에 던져진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인 상호부조로서 상호연민, 상호지지, 상호공감, 상호보호, 상호감동은 몸이 먹는 밥과 같이 정신이 먹고 사는 정신의 양식이다. 사랑마저도 상호부조가 없는 사랑이라면 지옥이 될 수 있다.
젊은 시절 시베리아와 만주를 탐험하며 많은 동물 종과 인간 공동체를 관찰하고 이를 토대로 경쟁과 적자생존, 강자의 약자 지배를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한 사회다윈주의에 반대한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는 그의 저서 『상호부조론』(1902 )에서 생물과 인간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해 경쟁보다 상호부조가 더 본질적이라고 말한다.
공격과 반격 등은 얼마간 인간사회의 진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지만, 【A의 공격> B의 반격(공격)> A의 반격(공격)> B의 반격(공격)】처럼 순환하는 인과 고리가 되어 결국에는 상호부조, 상호보호가 망가져 개체의 생명과 공동체의 사회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유지되기 힘들어진다.
2. 남은 약자들
2023년 7월 18일 서울 서이초등학교에서 2년 차 여교사가 교내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2025년 2월 10일 대전의 초등학교에서 40대 여교사가 8세 여학생을 흉기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 사건들에서 공히 피해자와 가해자는 상식적으로 강자라고 할 수 없는 약자들이다. 한 사건에서는 약자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다른 한 사건에서는 가해자는 외부로부터의 약자이고 피해자는 이 약자와는 비교 불가한 더더 약자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현재 학교의 기능 중의 기능은 돌봄과 보호, 그리고 감독이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주로 돌봄, 초등 고학년과 중학교 1, 2학년은 주로 보호, 중학교 2, 3학년과 고등학생은 주로 감독하는*(주2)것이 학교의 기능이다. 문제는 돌봄, 보호, 감독을 담당하는 유치원, 어린이집 및 초중등 교사들 또한 돌봄, 보호, 감독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대로 경쟁과 적자생존, 강자의 약자 지배를 자연법칙이고 인간 사회의 작동 원리라고 생각하며 힘의 물리적 측면을 주도하는 소수, 오직 돈벌이와 그릇된 자기 영향력에 도취된 상당히 재능이 있는 종교 팔이와 유튜브 제작자, 스스로 관찰하고 사유하지 않고 유튜브 등을 카피하여 머리에 복사, 장착한 무시할 수 없는 다수를 들 수 있다.
목하, 이들이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는 언어와 제도의 활용; 오염시키기와 악용하기이디. 이들은 언어와 제도를 사익을 위해 활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이익이 될 것 같으면 능숙능란하게 금세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언어와 제도를 공격해버린다. 이들의 힘은 단결이다. 자기들이 원하는 시스템을 위해 비뚤어진 언어로 선동하고 전파하고 광장에 모인다.
다른 한 가지는,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연약함에 대해 말하였다. 그 여러가지 측면 중 민주주의 이념성, 이념화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외면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화석화된 사상이어선 의미가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 시대라는 말이 가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고체가 아닌 기체이고 액체이어야 한다.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나 영원히 흐르고 퍼져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류의 초기 군집생활기에도 작동하려고 했을 것이고 작동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초기 인류 사회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항상 작동하려 했을 것이고 당시 당시의 역량만큼 작동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록도 역사도 주장도 사상도 이념도 미래도 아닌 저마다의 방법으로 참여하는 오직 현재, 오직 행동 실천이어야 한다. 비록 보잘것없지만 행동하는 민주주의 가장 멋있는 실천은 '벼람박에 대고 욕이라도 한다‘는 작은 단위 행동이다. 왜 이 말을 하는가?
사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민주주의 하면 대뜸 전국적이다. 거시적이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가 덜컹덜컹하는 것은 가정, 학교, 직장 등 작은 단위들에서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 기본 이유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민주주의를 의식해야 한다. 심지어는 여러 개의 나*(주3) 사이에서도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고 탄탄해지려면 미시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왜?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람들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여기고 있다. 아마도 1987년 6월 대항쟁으로 대통령 직접선제를 쟁취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87년체제로 제6공화국을 출발시키고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를 경험하고 김대중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하여 제15대 대통령으로 경험하면서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고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경험하며 그러한 판단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노태우, 김영삼 시대를 지나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비로소 민주주의를 달성했다고 치자. 그런데 뭐?
3.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를 아주 큰 배라고 가정해보자. 언젠가 한국 사람이 민주주의라는 배를 훌륭하게 건조하여 바다에 띄웠다. 그리고 한국 사람 모두는 당연히 그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배는 민주주의라는 거선이 마음껏 항해할 수 있는 대양을 향해 항구에서 출발했다. 묻느니 이 배에 탄 모든 사람은 민주주의 행동 실천을 할까? 민주주의를 제도라고 여길 때 민주주의에 의해 권력 등을 빼앗긴 측도 있을 것이니 이 부류는 일단 제외하자. 그런데 또 뭐가 문제인가?
민주화가 된 사회에서 살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 민주화가 된 세상의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남자, 민주화가 된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여자, 민주화가 된 학교에 다닐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 민주화가 된 학교의 학부모로 살 준비가 되지 않은 학부모가 모두 함께 민주주의 배에 올라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문제는 민주주의 행동 실천이 거시적으로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부한 이후이다. 국가 단위 사회에서 거시적인 행동 실천의 지속과 함께 가정, 학교, 사회 곳곳의 작은 단위에서 미시적인 작은 민주주의 행동 실천들이 이루어졌으며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작은 단위 현장에서 대대적인 민주주의 행동 실천의 드라이브는 없었다. 그 결과 민주주의라는 농사짓기에 습관 형성이 안 된 사람들은 오직 민주주의라는 열매를 따 먹기에 관심을 집중한다. 대체나!
들여다보니 민주주의에는 책임을 지지 않고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여기저기 빠져나갈 구멍과 비집고 들어가 숟가락을 얹을 수 있는 틈새가 적지 않다. 경쟁과 적자생존, 강자의 약자 지배 자연법칙이 이곳에서야말로 진정 통하지 않는가? 민주주의니까, 자유니까, 자유민주주의이니까. 필연적으로 이런 세상에서는 약한 고리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많은 제도들을 텍스트로 읽으면 그렇게 나쁘지 않다. 한때 악명 놓은 역할을 하고 지금은 사라졌거나 지금 현재 지탄을 받고 있는 법과 제도는 생각만큼 그렇게 나쁘지 않다. 좋은 문장들로 빚어진 조항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훌륭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활용인 것이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선용하고 선용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만사와 시스템을 악용하고 악용하려고 노력한다.
사적 욕망과 사적 이익을 노리는 불량지도자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민주화가 된 세상에서 살 준비가 안 된 불량국민은, 최근에 들어오면서 주로 법 제도를 능란하게 활용하면서 민주주의를 악용하고 때로는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일을 일삼는다. 이들 중 힘 있는 소수는 다양한 방법으로 선량국민을 권력 등의 유지 수단으로 활용하고, 곳곳의 다수 불양국민은 다수 선량국민을 대상으로 힘 있는 자의 자유와 민주, 불량한 자의 자유와 민주를 향유한다.
4. 학교에서는
이제 범위를 학교로 좁힌다. 인간사회로 볼 때, 학교는 학생, 교사, 학부모가 있다. 이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대응 관계로 보면, 학생 vs 학생, 학생 vs 교사, 교사 vs 교사, 교사 vs 관리자, 학생 vs 학부모, 교사 vs 학부모 등이 있다. 이중 학생 vs 학생, 학생 vs 교사, 학부모 vs 교사, 학부모 vs 학교, 이렇게 네 가지로 개인 또는 그룹의 갈등을 살펴보자. 크게는 교사와 학교 vs 학생과 학부모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교사 vs 학생, 그리고 교사 vs 학생과 학부모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불량학생과 불량학부모의 사적 욕망과 이익 추구에 기반한 민주주의 행동 실천 거부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들은 민주화된 국가와 사회에서 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그리고 민주화가 된 학교에 보내고 다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불량민주주의 시민이다.
이 세상 어디나 사람이 모인 곳에는 범죄와 벌이 있게 마련이다. 학교도 사람이 모인 곳이다 보니 그 모든 유형의 범죄는 아니지만, 당연히 사회로 보면 범죄라고 할 수 있는 일탈이 있다. 문제는 그 중 단순하고 순박하고 가해와 피해가 직선적이고 되풀이 중복되지 않아 해결이 쉬운 경우가 아니라 지속적, 지능적, 집단적이고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편 교사의 위치는 어떤가? 과거에는 학교 밖 사회의 언어로 말한다면 【체포/소환 - 조사 - 판결 - 벌 집행】, 이 모든 과정을 교사가 도맡아 하면서 학생에게 반성, 용서, 화해, 회복, 친교, 우애 등의 도와 덕을 가르쳤다. 우리는 그것을 「교육」 이라 했고, 교직을 성직이라고 했다. 지금은 모두 알량한 「법」과 위대한 「법조인」에게 빼앗겨버렸다. 돈은 맹렬하다. 권한과 권위는 빼앗기고 책임과 비난을 받아 안는다. 교사에 대한 반감, 흠집 내기, 도전, 공격, 겁박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동시에 교육적 도덕적 기대와 요구는 과도해졌다. 교사는 심신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허우적거리며 정신병원의 문 앞을 서성인다.
학생에게 학교는 노는 곳, 자는 곳, 쉬는 곳, 약자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곳, 강자를 피해 슬금슬금 떠도는 곳, 강한 척하기 위해 교사에게 도발하는 곳,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교사에 대한 도발에 동조하여 크게 웃고 소란스러운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 곳이다.
교사에게 학교는 날이 새면 가고 싶지 않은 곳, 교실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 수업은 시작종이 울리면 억지로 끌려가는 곳 - 교사가 오든 말든 떠들어 들어가자마자 소리치다가 '왜 소리치냐'고 되려 얻어듣는, 말없이 우둑하니 서 있다가 '왜 공부 안 가르치냐'고 얻어듣는 곳이다.
교사에게 학부모는 문제를 만들고 발생시키는 학생을 지도힐 때, 필연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어야 할 미지의 두려움이다. 근무시간에나 퇴근 후에나, 아무 때나 전화벨로 울리는 두려움이다. 문제 학생을 지도하다가 공조하고 협력하여 교육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연락을 하면 강적 뒤에 있는 더 큰 강적이다. 민원에 시달리거나 고소 고발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교사는 트라우마와 신경증으로 심약한 직장인이 된다.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에게, 그들 사이에,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야 할,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일어남 직한 일들이, 영화의 장면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원인이 없어지면 결과가 없어지는가.
5. 순환하는 인과 관계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동일한 유형의 갈등이나 사건이 지속적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면, 그 갈등이나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순환하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대표적인 경우는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가족 간의 불화와 갈등을 들 수 있다.
가족 내 문제와 마찬가지로 교사 그리고 학생과 학생의 부모라는 입장으로 양존하는 인격들이 학교 교육의 장에서 서로 불신하고 맞서며 대립하고 학생과 교사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는 사건이 지속적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이유는 역시 이들 인격체들이 갈등과 사건의 ”순환하는 인과관계“의 고리를 타고 돌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과 학생의 부모와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하고 보호받지도 못하고 힘없고 연약한 존재로 지속적 반복적으로 공격을 당하면 인내와 회피로 극복하려 노력하겠지만 전인적 궁지에 몰리고 피해의식이 커지면 반발과 반격의 자기보호 심리 상태에 빠진다.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일차적 행위는 공동체주의적이다. 이에 비해 학생과 학생의 부모가 바라는 기대는 일차적으로 개인주의적이다. 개인 학생이 학교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하고 보호받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생겨나면 학습과 학교생활에 의욕을 잃고 가르침에 거부감을 지니며 간섭이라고 여기며 반감을 갖게 된다.
학생이 교사와 정서적 애착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공동체주의적 교사에 대한 불만은 잠복하여 있다가 학교폭력이니 교권침해 등이 발생했을 때 사안의 처리 과정과 일상 교육 활동인 생활지도 과정에서 교사의 교육행위에 대해 공감하며 인정, 수용하지 않고 반발하고, 때로는 부모에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여 보고하고, '선한 나와 악한 선생님' 프레임을 만들어 부모의 도움을 요청한다.
소위 학생인권조례와 생활지도메뉴얼이 시행되기 이전의 전통적인 학생지도 방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교사는 학생 인권침해와 아동학대방지 관련 법의 덫에 걸리게 된다. 학생인권조례에 동의하고 생활지도메뉴얼에 충실하여 학생지도에 임하는 교사가 사건 해결의 국면에서는 스스로에게 거의 법조인의 능력과 기능이 요구되지만, 교사는 법조인이 아니고 연약한 교육자일 뿐이어서 무기력함, 자괴감, 비애감에 빠지게 된다.
교육의 영역에서 교사, 학생, 학생의 부모, 불량시민이 서로 비방하고 조롱하고 혐오하고 공격과 반격을 주고받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인간의 사회적 본성인 상호부조로서 상호연민, 상호지지, 상호공감, 상호보호, 상호감동이 아니다. 그런 마음과 행동은 선한 것이 아니다. 악한 것이다. 그런 세상은 민주화가 된 세상에서 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힘 있는 자의 민주주의, 힘 있는 자의 자유, 힘 있는 자의 공정, 힘 있는 자의 상식, 힘 있는 자의 법의 세상이다. 그 세상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마음씨 좋고 착한 연약한 사람들이 아니다.
6. 상호보호를 회복하는 일의 영향
학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사실 다른 어느 단위보다도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이곳에도 죄와 벌이 있다. 그러나 청소년 비행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민주화된 학교에 다닐 준비를 해서 보내지 않아서 민주화가 된 학교에서 생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아동과 청소년, 그리고 연약하여 늘 다른 학생, 교사,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아동과 청소년의 반격이다. 이들에 대한 연민, 공감, 정서적 지지, 그리고 사랑과 보호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교사는 어떠한가. 우리는 알고 있다. 동네 사람들도 다 알고 있고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남녀노소, 세 살 아동, 젖먹이들도 알고 있고 산천초목도 알고 있다. 교사는 이미 사회적 약자가 된 지 오래되었다. 실제로 '교사 10년 해도 오늘 계급장 단 순경보다 힘이 없다.' 교사 집단도 사람이 모인 곳이라 나쁜 사람이 없을 수 없지만 그래도 '교사 날당보 10단이라 해도 사회에 나가면 1급도 못 된다.'
많은 교사가 힘들어하고 있다. 학교에 출근하기를 힘들어하고 교실에 들어가기를 힘들어하고 수업하기를 힘들어하고, 학생 만나기를 힘들어하고 학생의 부모 만나기를 힘들어하고 있다. 정신병원의 문 앞을 서성이고 있다.
사회가 경쟁과 적자생존 중심으로 돌아가고 강자의 약자에 대한, 다수의 소수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공격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할 때, 약자인 아동, 청소년 학생과 연약한 교사는 약한 고리가 된다. 공격을 받는 피해자가 되는 연약한 자는 더 약한 고리를 공격하는 가해자가 된다. 불량국가, 불량사회에서는 이러한 비극을 중지할 수 없다.
결과가 교사의 희생이면 학생과 학생의 부모 그리고 일그러진 사회가 원인이 아닌지. 결과가 학생의 희생이면 교사와 학교와 그 학생의 가정과 사회가 원인이 아닌지. 원인과 결과가 지속적 반복적으로 순환하면서 가해자가 피해자였고, 피해자가 가해자였지는 않았는지. 우리 모두가 피해자인 줄만 알고 우리 모두가 가해자라는 자각과 성찰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계속 살펴보아야 한다.
학생의 보호의 한 축은 교사의 보호를 통해 가능하다. 교사를 비난하고, 교사의 정신을 병리적으로 보고, 교사의 자질과 자격을 논하고, 교사의 선발 기준을 강화하고, 교사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하고,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스컴에 출연해 해답을 제시하고,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만들고 등등 온갖 처방을 하겠지만, 교사가 보호받지 못하면 교사는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다.
교사는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실제로 힘없는 집단이다.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학생은 선하고 착한 아동 청소년들이다. 이런 인격들이 모여 배우고 가르치며 미래를 꿈꾸는 곳이 바로 학교이다. 교사에 대한 연민, 지지, 공감, 보호, 감사와 감동은 고갈된 교사의 에너지 빌딩에 보약이다. 사기와 에너지가 충전된 교사는 연약한 학생들 사랑하고 보호한다. 이제 당신의 자녀와 그의 선생님 사이의 사랑과 보호는 예쁘게 순환될 것이다.<끝>
------------
주1) 에리자베쓰 퀴블로 로스 박사는 죽음을 수요와는 다섯 단계로 부정, 분노, 타협, 수용, 우울을 들고 있다.
주2) 만약 중2(14세)~고3(18세)의 청소년이 학교라는 제도와 물리적 담장 안에 있지 않고 성인과 함께 학교 밖 생활을 한다면 아무래도 이들의 비행과 범죄가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감독이라는 말을 쓰면서 머릿속에 담고 있는 생각은 1960년과 1980년이다. 1960년 4.19에는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참여했다. 그러나 1980년 봄과 5.18에는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오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고교평준화의 시행이다.
1974년, 서울과 부산의 입학생 고교평준화 시행과 1976년, 각 도청소재지 고교의 입학생 고교평준화 시행은 고등학교의 풍토를 전면적으로 변화시켰다. 넘사벽이었던 경기고 등의 기존 명문고와 추첨방식으로 똑같이 학생을 배정받게 된 학교에서는 명문고를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핵심 방법으로 학교 내에서 보충수업 강화와 야간자율학습 시행이다. 심한 경우 학생들은 밤 11시까지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해야 했고 교사는 학생을 감독하며 따르지 않고 도망친 학생들을 혹독하게 체벌하여 관리하였다. 폭력의 제5공화국 시대는 폭력이 답이었다.
주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런 기승을 부렸는데, 현재의 사립 명문고 중 상당수는 이런 폭력의 탑 위에 서 있다.
사립학교들의 소위 명문고 만들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1980년대 내내 강압적으로 계속된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은 많은 학생의 자살로 사회문제가 되고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다. 전두환의 독제정부가 의도했는지 아니면 공교롭게 맞아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서울 등 대도시의 고교평준화로 인한 고교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 주말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은 고등학생들을 학교 담장 안에 가둬놓고 감독하는 기능을 하게 되어 전두환 정부는 4.19와 같은 고등학생의 데모를 막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이다.
주3) 1975년 시골에서 도시로 처음 유학왔을 때, 쌀을 사 먹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까지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쌀은 논에 모를 심고 가꾸어 벼를 수확해 곳간에 두고 방아를 찧어다 먹는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병물을 처음 사 먹어야 했을 때, 물을 다 사 먹다니 하고 타는 목마름(?)을 참고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까지는 물을 우물에서 길러 먹고, 도시 수돗물을 끓이거나 해서 먹는 것이었다. 그 무렵 아직 순수하였을 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고 ‘이중 인격자?’, 세상에 이런 나쁜 놈이 있다니 하고 놀랐다. 지금 시대에 이중 인격자는 순진한 사람이다. 현대인은 내적 외적으로 ‘다중 인격자’로 살아간다. 여러 개의 자아, 여러 개의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크게 나누어 ‘밝은 나’와 ‘어두운 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대문자 나(I) 안에서 여러 개의 소문자 나(i)가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소문자 나(i)들의 민주주의는 필연적이다. 가장 미시적인 민주주의 터이고, 거시민주주의까지 모든 민주주의 하부 토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