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말들의 세상, 꿈꾸는 말들의 향연 - 김민휴의 시
안개의 심연
김 민 휴
안개는 안개밭에서 자라지만 줄기와 잎과 꽃이 따로 없다. 무럭무럭 가득해 부푼 안개가 있을 뿐이다. 안개밭의 수면은 안개다. 안개밭의 하늘은 안개다. 안개는 피어오르고, 불어나고, 너울거리고, 흘러내리고, 밀고 올라가고, 파고든다. 안개는 강바람처럼 다가와 물상과 물상을 제 심연에 담고 버무린다. 안개는 바람을 끌고 가고, 바람을 뒤쫓아 가고, 바람에 나부끼고 바람을 재운다. 안개는 빛과 어둠의 틈과 땅과 하늘의 허공을 지운다
안개는 정복하지 않고 다가와 스며든다. 안개는 물상과 물상의 사이에 끼어 벽이 되지 않고, 물상들의 안과 밖의 틈에 스며들어 모든 경계를 지우고 물상들을 섞는다. 안개가 물상들의 혈관을 타고 전체로 퍼져갈 때 물상들은 두렵지 않고 낯설지 않고 거북하지 않고 나른하다. 모든 물상들은 안개에 정복될지언정 스스로 몽롱하고 편안하다. 안개가 촘촘히 스며든 시간은 애초부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는 듯 흐르지 않는다
안개가 키우는 단 한 가지는 저쪽이다. 누구든지 안개의 영토에 들어간 순간 그는 이쪽이 된다. 그는 갑자기 공상가나 탐험가 된다. 그는 땅굴을 파듯이 안개를 파고 들어가고 싶고, 안개 밑으로 내려가고 싶고, 안개 속에 길을 내고 싶고, 안개의 저쪽이 궁금해 더듬거리고 싶고 안개 속에 헛기침을 하고 싶고 희미하고 아득한 귓속말로 기척을 하고 싶다
누군가 저쪽에서 뽀드득 뽀드득 안개를 밟으며 길을 내어 오고 있는 것 같다. 삽으로 안개를 떠내며 굴을 파들어 오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저쪽에서 사각사각 안개로 벽돌을 찍어 팔고, 누군가 그 안개벽돌을 사다가 안개벽을 쌓고, 안개지붕을 덮고, 안개집을 지어 안개창문을 열고 메아리를 해줄 것 같다
안개 속에는 안개구절초가 있고, 안개갈대가 있고 안개강둑이 있고, 안개신갈나무가 있고, 키 큰 안개미루나무가 있다. 안개노래가 있고, 안개이별이 있고, 안개그리움이 있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누구나 개별자가 될 수 없다. 누구나 안개가 될 뿐이다. 안개의 영토에는 안개에 쓰러지고, 안개에 허물어지고, 안개에 묻히고, 안개에 풀어진 안개의 심연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