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시간이 이른 아침이라면
첫 번째 할 일은 차를 끓이는 것이다.
차는 움츠린 영혼을 북돋워주는 가장 탁월한 약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다양한 임무를 시작한다.”
_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中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책상 앞에 앉기 전에 습관처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마실 것’을 준비하기다. 이걸 거창하게 의식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진 않다. 준비하는 과정이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지나치게 힘을 빼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몇 가지 종류의 커피 캡슐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머신에 넣고 작동시킨다든지, 얼음이 담긴 유리잔에 캔 커피를 붓는다든지,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데운 뒤 찻잎이 담긴 거름망을 흔들어 천천히 우리는 정도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차가운 탄산수에 과일 청을 넣어 에이드를 만들거나 간혹 달달한 것이 필요한 날에는 커피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두 스쿱 담기도 한다. 콜라를 비롯한 각종 탄산음료에다가 커피를 나만의 황금 비율로 섞어보는 실험정신을 발휘할 때도 있고, 이도저도 아닌 날에는 그저 뜨거운 물에다가 믹스 커피나 원두 가루를 붓고 스푼으로 저으면 끝이다.
그러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다. 단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실 것’은 꼭 필요하다. 때로는 음료가 가득 담긴 머그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하루 일과를 위한 연료가 채워졌음을 느낀다. 고백하자면, 나는 먹는 것보다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커피든, 차든 하루에 몇 잔씩도 들이켠다. 너무 싫어하는 종류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좋다. 사실 ‘내가 너무 싫어하는 정도의 마실 것’도 없다. 차갑거나 따뜻한 것, 달콤하거나 씁쓸한 것(혹은 둘 다), 조금 물컹한 것이 씹히거나 아니면 투명한 액체로만 이루어진 것…….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른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간에 눈앞에 마실 것이 한 잔 있으면 마음이 가지런해지면서 일을 해치울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게 꼭 마법 같다. 원고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혼자 작업할 때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마주 앉아서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는 때라도 그렇다. ‘마실 것’이 환기해주는 약간의 틈, 그 사이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 차분해지는 그 느낌을 좋아하는 거다. 나에게는 지금 일의 강약과 속도를 조절할 힘이 있어……. 이렇게 주문을 걸어주는 마법.
오늘도 탁자 위에 놓인 무엇인가를 한 모금 들이켠다. 언뜻 별 생각 없이 이루어지는 이 행위가 나를 말없이 격려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돕는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생각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틈틈이 ‘마신다.’ 그다지 차분하지 않은 성격의 내가 고요하면서도 기분 좋게 가라앉는다. 나는 이제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그토록 마실 것을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