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날로 불행이 업데이트 되어가는 것만 같은 이 지겨운 추위 속에서, 봄날과 여름날의 눈부신 햇살을 떠올려보는 것은 희망일까. 그 풍경 속의 나는 얇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타이핑하는 소리는 경쾌하고 바깥에는 간혹 새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나는 더 이상 목이 쓰라리게 아프지도 않고 몸 어딘가의 극심한 통증 때문에 고통스럽지도 않다. 마음이 내키면 슬리퍼를 끌고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날이 다시 올까?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들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씩 떨어져 내린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여기는 눈물로 둘러싸인 슬픔의 집이다. 누군가가 손가락을 들어 창밖에서 선을 내리긋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왔어. 다정한 속삭임 같다. 어렸을 때, 아주 추운 겨울날이면 나도 성에가 낀 거실 유리창에다가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곤 했다. 그때도 물방울들은 긴 사선을 그리며 또르르, 아래로 흘러내렸다.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비친 불빛들이 아름답게만 보였었다. 그때는 세상이 아름다웠다.
물방울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저절로 닦이면서 점점이 흔적들만 남는다. 반짝거리며 주춤하다가 단번에 일직선을 그어버리는 것들도 있다. 나는 그것들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아름답다. 여전히, 삶은 아름다운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창밖으로는 매서운 추위가 한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