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아직도 운동화를 어떤 정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 이를테면 너무나 갖고 싶었던 운동화를 드디어 손에 넣은 날, 품에 꼭 안고 잠들었던 어린 시절이라든지. 낡고 닳아질 정도로 오래 신었지만 발로 뛰어다니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버리기가 어렵다든지. 수많은 물건들 가운데서도 운동화에는 유독 기억할 만한 이야기나 추억이 종종 깃들게 되는 것 같다.
대체로 물욕이 적은 편인 내가 눈독을 들이고,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그냥’ 갖고 싶어 하는 아이템 역시 운동화다. 관심 있는 제품의 출시 소식을 확인하려고 부지런히 홈페이지를 들락거리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여러 켤레를 구입하기도 한다. 한정판이라는 이름이 붙은 제품에 목숨까지 걸진 않지만, 정말 갖고 싶은 에디션이 출시되면 매장으로 곧장 달려가거나 놓치게 됐을 경우 중고시장을 들쑤시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에게 운동화는 단지 운동을 할 때 신거나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발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수 있다는, 뛰고 싶은 만큼 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언뜻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걷거나 뛰기에 편하도록 설계된 인체 공학적인 요소도 멋지다. 무엇보다 격식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그 자유로움을 사랑한다. 갑갑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나에게 운동화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와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걸 상징하니까. 쉽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수트나 단정한 정장과 매치했을 때 빚어내는 독특하고 이질적인 아름다움도 마음에 든다.
이 모든 것들이 운동화라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물건이 품고 있는 정서다. 어쩌면 나는 운동화 자체보다도 그러한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발장을 열면 십 수 켤레의 운동화가 가지런히 진열돼 있던 시절은 가고 이제는 마음에 드는 한두 개의 제품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지만, 오늘도 나는 궁극의 운동화가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을 신고 마음껏, 내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