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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우작 Nov 15. 2022

모처럼 경주하였네

    삼십 대 중반인 나에게, 다시금 시간을 돌려 "수학여행을 갈 건데, 어디로 갈래?"라고 선생님께서 물어보신다면 "경주요."라고 말할 것 같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익히 들어 친숙한 나머지, 그 위상을 마주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내가 자란 대구에서의 경주는 위성 도시로 착각할 만큼 친숙함이 있는 곳이었다. 연애 때 한 번, 결혼하고서 한 번. 학창 시절의 감각이 상실된 이후로, 딱 두 번 가 보았다.




첨성대

    

    해가 저물 무렵, 첨성대를 방문했다. 어김없이 빛을 내는 카메라 셔터들. 플래시보다 밝은 사람들의 미소들. 모처럼 나와 본 경주는 건강했다. 의심 없이 첨성대를 둘러보고는 조금 더 걸어 경주석빙고로 향했다. 경주석빙고. 주위를 둘러보면, 썩 높은 건물들이 없는 고즈넉한 경주에서 그나마 고지대에 위치한다. 부모님을 모시고 온 이들, 부부로 보이는 이들, 막 시작하는 연인들의 소꿉 가득한 미소들. 연을 날리는 아이와 바라보는 엄마. "여보, 우리 잘 살고 있는 거지? 행복이 멀리 있을까. 이게 행복인 거지?"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변해 간다. 모든 건 변했다. 아내와 나는 지난 시간들을 온몸으로 남김없이 체화했다. 노화 탓인지 피부는 좋아지고, 식성이 달라지며,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안락함을 찾아 나섰다. 새로움이 겁났고, 항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둘의 믿음은 강력해졌다. 그렇게 서로 기대어 살아갔다. 어김없이. 경주에서의 날들은 '진짜 어른'에 대한 탐구를 낳았다.




밀면


    2박 3일의 일정, 중간에는 자전거를 이용했다. 여기, 저기, 거기. 휴대폰 지도에 있는 '별 표시'를 따라 곳곳을 다녔다. 그 별 중 하나인, 불국사 부근에 위치한 밀면집. 옥수수전분과 꾸지뽕잎 가루를 넣어 만든 면이었다. "심심해서 좋다. 생각나겠는데?" 


    일상과는 조금 다른, 성숙을 품었던 마음들을 나열한 시간들. "여보, 하고 싶은 말, 이틀만 삭히고 사흘째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이 되자.", "좋아. 대신 버티기 어려울 만큼 힘들 때에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자.", "그래, 문득 누군가에게 생각나는 그런 어른이 되자.", "지금 힘들어도 혹시 내일 없어질 우리를 위해 오늘의 기록을 남겨 두는 어른이 되자.", "손해가 눈앞에 뻔히 보여도, 내가 감당이 될 정도의 손해라면 살짝 눈감아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자."




천마총

    

    "릉, 묘, 총... 무덤이잖아. 무덤 앞에서 이렇게 즐겁게 사진을 찍어도 되는 거야?" 나의 질문에 우리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고즈넉한 말소리'와 같은 경주. 예스럽고 높이가 한없이 낮은 경주. 너그러운 품속 온기 남아 있는 경주. 기억에 남는 장소에는 줄곧 기억에 남는 음식이 함께했지만, 의외로 음식보다는 공간이 많이 남았던 경주였다. 경주한 경주. 강물이 쏜살같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듯, 경주의 기억은 일산 어느 집에 앉아 있는 내게 경주하듯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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