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탁교제를 좋아하고 필수라 여긴다. 대신 내 앞에 누가 앉아 있느냐에 따라 식탁 위 교제의 심도는 심히 달라진다. A와 함께라면 서너 시간은 거뜬하고, B와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밥을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게 된다. C와의 시간은 수다를 떠는 시간이 되고 D와의 시간은 인생을 주고 받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이 모든 경우를 하게 된다. 좋을 때 안 좋을 때, 기쁠 때 슬플 때, 술이 있거나 술 없이 단출한 식사에서도 말이다.
밥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 생존과 허기짐, 쾌락, 관계, 그래야만 할 거 같으니까, 그래 왔으니까, 신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으니까 우리는 밥을 당연히 먹는 것 같다. 당연한 거. 당연한 건 익숙함을 선물하지만 권태를 제안한다. 그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가급적 매일 다른 메뉴를 먹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연함이 권태와 더 친하다고 느끼는 나는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대화를 하고자 한다.
사 먹든 해 먹든, 음식에는 금전이 따라야만 한다. 하지만 ‘말’ 자체로는 돈이 들지 않는다. 분위기 좋은 곳이든 허름한 곳이든 지하 냄새 가득한 공간이든 호텔 라운지든, 앞서 말한 A와 C와 D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다. 되려 연애 시절부터 아내와 나는 우리 기준에 부합되는 위생적인 곳만을 갔다. A와는 갔던 곳을 아내와는 가지 않았고, 아내와만 가는 곳을 C와는 가지 않는다. D와 가는 지하 호프집은 E와 함께 셋이 가지만 아내와는 가지 않는다. 연애 시절을 지나 결혼 3년 차의 우리는 이러한 경향이 더 짙어졌다.
“밥 먹자.”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하는 나이인 거 같다. 이제는 함부로 밥 먹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키지 않은 누군가의 밥 먹자라는 말에 대한 대답 또한 적절한 무엇을 찾아 거절한다. 한 끼의 소중한 시간을 아무나와 보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무개일테고, 누군가는 나에게 아무개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개와 아무개가 만나 식사를 나누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시간 역시 소중하며 상호 존중을 위해서도 굳이 내키지 않은 시간을 소비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간혹 예기치 않게 그저 그런 관계들이 식사로 하여금 돈돈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저 그런 상대와 앉아 있는 건 어쩌면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식탁 위의 교제. 영양 섭취의 목적보다는 교제가 우선인 나의 식사를 통해 나는, 아내를 만났고 오랜 친구를 만났으며, 건강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