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중력

by Bee

정말 오랜만에 피아노를 쳤다. 호주에 오고 난 뒤로 피아노가 집에 없으니 칠 기회가 잘 없었는데 마켓을 놀러갔다가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보고 망설이는 날 Y는 밀어서 쳐보도록 했었다. 그 일이 나를 피아노 앞으로 다시 불러들인것이다. 피아노는 나를 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날 마켓에서 피아노를 치고 나왔을 때 나는 역시 다시 피아노를 쳐야겠다고 확신했다. 오랜만에 쳐본 익숙한 곡들을 제대로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과 들뜨는 마음이 손을 움직이게 했다. 그날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쳐보고 싶은 곡들을 들으면서 저장했고 무릎에 손을 두드리며 피아노가 있다고 생각했다. 찾아보니 시티의 한 도서관에서 피아노 연주실을 시간당 빌려줬고 마침 학생이라 할인도 되었다.


예술과 가까운 삶을 살고있다. 아침에는 일 인터뷰가 하나 잡혀 그걸 보고 근처에 가고싶었던 식당이 있길래 가서 디저트를 먹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곤 도서관에서 와서 2시간동안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실은 이 세상과 분리되어있는 것만 같다. 시간을 알 수 없는 공간같이 말이다. 나는 저장해놓은 악보들을 쳐보고 또 내가 가장 익숙한 쇼팽 흑건도 연습했다. 한 곡을 자신있게 연주하고 싶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흑건을 치고 또 치고 반복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계속 연습하고 연주하는 걸 영상을 찍어놨는데 참 재밌게도 처음 연주랑 마지막 연주랑 2시간동안 달라진 걸 느꼈다. 내가 살리고 싶은 부분을 마지막 부분에서 더 살렸고 더 마음에 들었다. 그 시간동안 나는 완전히 몰입해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도 엄청 몰입하지만 오랜만에 피아노를 쳐서인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게 영상에서 계속 보였다. '아니지', '왜이리 안되지?', '해보자', '너무 달리기만 하는거 같아 (느낌이 없어)', '이거지', '맞아 해보자', '잘했어', '이게 될까?' 하는 말들이 오가는걸 듣는 것도 나름 재밌다. 내가 피아노 선생님이 된것마냥 스스로에게 조언하고 응원하고 또 그곳에서 나올 때 조금이라도 나아진 나를 느끼는게 역시 음악이 주는 매력이겠거니 싶었다.


연습을 끝내고 과제를 하러 도서관에 앉아있는데 2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멍했다. 그리고 흑건이 빠른 호흡의 곡인만큼 쉬지않고 연습했더니 오른 손목이 엄청 욱신거렸다. 그래서 영상을 찍으면서도 느낀게 가면 갈 수록 이어지는 부분에서 손목 때문에 안넘어가기도 했었다. 짧은 시간동안 불태우고 이제 현실 세계로 돌아 올 시간인지 아까 찍은 영상을 에어팟으로 들으며 창 밖을 그냥 멍때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느낀 건 내가 예전에 TCI검사를 했을 때 자기초월이 정말 높게 나왔는데 그게 우주 만물과 연결감을 깊게 느끼는 거라고 했다. 나는 정말 그 자체인 것 같다. 오늘 택시에 고인 빗방울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고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감각들이 남들보다는 예민하고 또 감동을 받는다. 오늘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도 치며 그저 이렇게만 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네고는 안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