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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인 Sep 01. 2022

긴 계절의 끝


비탈길을 걷고 또 걸었다. 휴대폰 속 지도가 안내하는 구불구불한 파란 선을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모퉁이를 돌고 가파른 계단 위로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다. 분명 이쪽으로 가면 건물과 건물 사이에 골목이 있다는데 도통 찾을 수 없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작고 낮은 빌라들을 스쳤고 보란 듯이 높은 언덕들을 숨이 차게 올랐다. 처음 만난 동네는 역시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극장이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던 연극 무대를 떠나 방송국으로, 요가원으로, 박물관으로 생의 무대를 전환하는 동안 그 경험의 무게만큼 극장과는 멀어졌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마주하는 그보다 더 새로운 존재들은 매 순간 내게 다른 감각과 화두를 던져주었다. 그 안에서 정신 없이 뛰놀며 나는 나를 깎고 붙이고 주무르며 새로운 형상을 조각해갔다. 변해버린 모습에 나도 오랜 친구도 서로가 어색해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저 나로 살아왔을 뿐인데 그때의 나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이토록 달라졌는데 오랜 친구는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그곳에 한결같이 있었음을 알았을 때. 새삼 우리가 이리 멀어졌구나 깨닫는다. (나만큼 오랜 친구 역시 달라졌음을 안다. 내가 변하는 만큼 당신이 변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기에. 우습게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아직 나는 내가 제일 커서, 변해버린 당신의 모습을 담을 만큼 품이 깊지 못해서. 그래서 그렇다.)

   다시 앉은 좁은 객석. 서로에게 닿지 않기 위해 한껏 어깨와 다리를 오므리는 사람들. 이 순간 한 공간에 모여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서로에게 닿아 있다는 것을 아는 채로 그렇게 우리가 된 이들은 일제히 무대에 어둠이 내려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캄캄한 적막 끝에 펼쳐질 어떤 세계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클락션이 울리자 병원복을 입은 세 명의 할머니와 그들을 보살피는 남자 간호사 한 명이 꿈처럼 그곳에 서있다. 기역(ㄱ)자로 굽은 허리, 바깥으로 휘어버린 두 다리, 새하얗게 바랜 머리카락. 세월에 녹슨 몸들이 분주히 살아 움직이며 하루를 살아내는 곳. 그곳에 영자씨가 있다. 영자씨는 병동 할머니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고령의 환자다. 깜빡깜빡 기억을 잊는 탓에 사람들과 소통이 어려운 영자씨는 여느 할머니들처럼 연속극을 보지도, 깔깔대며 수다를 떨지도 않는다. 그저 작은 의자에 몸을 구겨 앉아 연신 ‘바지’를 찾을 뿐이다. 바지야, 바지야. 그의 음성과 함께 무대 한 켠에 있던 가로등이 깜빡깜빡 빛을 낸다. 그리고 영자씨의 과거로, 택시 운전사 시절로 시간을 이동한다.  

   병동의 작은 의자는 영자씨의 자랑스러운 택시 운전석으로 변모한다. 택시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 영자씨는 부산 일대를 누빈다. 운전석에 앉은 영자씨에게 움츠러든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핀 어깨, 거침없는 걸음걸이, 누구보다 큰 목소리, 그리고 여성 택시 운전자로서의 자부심. 오직 이것들이 영자씨를 대변할 뿐이다. 그 시절 소수의 여성 택시 운전사로서 영자씨는 여성운전사회(이하 여운회)를 이끌며 후배들의 왕언니 노릇을 자처한다. 택시 앞에 무단으로 짐을 쌓아 놓은 적재차 아저씨들과 소리 높여 싸우고, 사무실 확장을 위해 여운회 공간을 빼달라는 회사의 요구에 앞장서서 분노의 목소리를 낸다. 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영역을 사수하기 위해 영자씨는 계속해서 말하고 소리친다. 그런 영자씨가 귀를 열고 누군가의 음성을 담는 공간은 작은 택시 안이다. 옆자리에, 그리고 뒷자리에 태운 손님들의 목소리를 영자씨는 듣고 또 듣는다. 애인에게 어설픈 청혼을 하고 온 말쑥한 차림의 젊은 남성, 일하느라 바빠 가족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엄마가 너무도 싫다는 여고생, 언니와 오빠처럼 가족에 보탬이 되고 싶다며 공장으로 돈을 벌러 가는 갓 스무살 된 여성,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며 택시 운전사가 되겠다는 20대 남성. 이들은 모두 영자씨의 가족을 암시한다. 치매에 걸린 영자씨의 기억 속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들. 미숙하고 풋풋했던 남편, 바쁜 자신을 대신해 가족들을 챙겼던 사춘기 첫째 딸, 말도 없이 집을 떠나버린 막내 딸, 지난한 생의 방황기를 막 통과한 장남. 그들 인생에 영자씨가 꼭 필요했던 순간, 영자씨는 그곳에 없었다. 그 부재의 감각은 생의 끝자락 모든 기억을 잃어가는 중에 마지막까지 남아 영자씨의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영자씨는 그때의 그들을 택시에 태워 달리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전한다. 아내로서, 엄마로서가 아닌 우연히 만난 택시 운전사로서. 그것이 오히려 영자씨에게는 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리라.  



(사진출처 : 신촌문화발전소 공식 블로그 / 사진제공 : 박주영)



연극은 영자씨의 이야기, 영자씨와 함께 생활하는 동생들(영자씨는 이들을 '바지'라 부른다. 극 중에서 영자씨가 찾는 바지는 하의의 한 종류인 바지가 아니다. 과거 영자씨가 애정했던 동료들이다.)의 이야기, 영자씨가 택시에서 만나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 집중한다. 이쯤에서 나의 오랜 관극 습관이 슬며시 발동된다. 이처럼 서사에 천착한 연극을 볼 때면 나는 늘 이런 물음에 빠지곤 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면 어땠을까? 혹은 짧은 단막극 드라마였다면? 영자씨의 이야기를 스크린이 아닌, 소설책이 아닌, 한 장의 이미지가 아닌, 이곳 무대에서 연극으로 말해야 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싶었다. 그것은 어떠한 새로운 감각. 감각으로써 ‘경험하는 일에 가까운 무엇이다. 작품을 만나러 갈 때면 나는 일종의 기대감을 품는다. 이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OOO를 보여줄까. 작품의 화두(이야기)가 가장 처음 작품에 관심을 갖게 하는 요소라면, 해당 작품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이유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 한가운데 나를 놓기 위함이다. 무대와 객석, 그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두고 그저 팔짱을 낀 채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닌 연극이 만들어내는 예상치 못한 수많은 기표들의 조합,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을 온몸으로 직접 느끼기 위함이다. 나는 그런 작품을 기다린다. 극장에서도, 미술관에서도, 책 속에서도, 가상공간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영자씨를 눈 앞에 둔 이 무대에서도.  


영자씨의 과거(로 읽히지만 사실 그의 기억이 만들어낸 환영)의 순간이 지나고 무대에는 다시금 어둠이 깔린다. 그리고 무대 바닥에 영상이 드리운다. 작품의 모티프가 된 실제 영자씨의 모습을 담은 푸티지 필름. 영자씨가 타고 다니던 택시, 택시가 누비던 부산의 어느 거리, 왼쪽 팔에 노란색 모범운전 완장을 찬 영자씨,  곁에 나란히 선 그의 바지들. 허구에 실재가 겹쳐지는 순간이다. 연극은 더 이상 무대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살아진, 이제는 사라져버린 어떤 생의 순간이 된다. 무대가 밝혀진다. 다시 지금 여기. 작은 의자에 몸을 구겨 앉은 영자씨가 보인다. 이제 관객들은 이곳의 영자씨를 통해 그곳의 영자씨를 본다.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 살아온 수많은 영자씨들을 떠올린다. 얼굴과 이름을 아는 누군가의 삶을 눈 앞에 살아 움직이는 다른 누군가(배우)의 몸을 통해 목격하는 일. 그리고 그 기묘한 시공 속에 함께 존재하는 일. 연극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극장을 찾아 무대를 마주하고, 무언가를 보고,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쓰겠다 마음 먹는 일. 연극의 잘못이었을까, 나의 문제였을까. 둘 다 일 수도. 아닐 수도.  

   영자씨의 딸 진희가 강냉이를 들고 엄마를 찾아 온다. 이웃 할머니들에게 강냉이 한 봉지를 선물하고 나머지 한 봉지를 엄마 손에 쥐어준다. 영자씨는 딸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딸은 개의치 않는다. 늘 그래왔다는 듯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다 어김없이 싸우고 영자씨의 손에 쥐어져 있던 강냉이는 그의 몸부림과 함께 어지러이 바닥에 흩뿌려진다. 잠깐의 침묵. 영자씨가 딸의 이름을 부른다. 진희야. 사랑과 미움. 서러움과 먹먹함.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마음.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게서 나와 내 엄마가 보인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장면 속에서 다가올 언젠가의 당신과 그런 당신을 마주할 늙어버린 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느낀다. 다시 연극을 볼 수 있겠다.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다.  


   영자씨가 말한다.

   “벚꽃은 다 짔나?”


   진희가 말한다.

   “다 짔지.”


   영자씨가 다시 말한다.

   “그라 뭐, 또 다시 피갔지. 드가자.”


바닥에 벚꽃처럼 어지러진 강냉이를 밟고 영자씨가 무대를 떠난다.  

   그의 기나긴 계절이 진다.  




 


공연 정보


연극 <영자씨의 시발택시>

일시 : 2022.4.22~30

장소 : 신촌문화발전소

작/연출 : 박주영

무대미술 : 남경식

조명디자인 : 김소현

의상디자인 : 이윤진

분장디자인 : 장경숙

조연출 : 박세련 김현빈

출연 : 최정화 임윤진 정제이 오수혜 장석환

제작감독 : 정석우

무대크루 : 문경태 박진호 김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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