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이빙의 날, 나는 또 한 번 자라났다

머리카락을 잃고서야 알게 된 용기와 사랑의 온도

by 지혜로운 기록


나에게는 오지 않길 바랐던 날.

결국 내 인생의 ‘쉐이빙의 순간’이 찾아왔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감을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던 머리카락들.

빗질을 할 때마다 바닥에 쌓여가는 머리를 보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실제로 살아내는 기분이었다.

두건이나 모자로 더 버텨볼까 고민했지만, 이미 수습은 어려웠다.


‘차라리 빨리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자.’

결심을 굳힌 뒤 눈여겨보던 가발 샵에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당일 예약이 잡혔다.

안도의 숨이 새어 나오면서도, 머리를 민 내 모습이 어떨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천천히 몰려왔다.


샵에 도착하니 원장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모자 가발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자, “쉐이빙을 먼저 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골라보자”고 권해주셨다.

가족 중 암 환자가 두 분이나 계시다는 원장님은, 혹시 내가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어 조용히, 자상하게 내 옆을 지켜주었다.


두피 트러블 때문에 완전히 밀지는 못하고 0.3cm 정도만 남겨 쉐이빙을 했다.

거울 속 모습을 마주했을 때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엄마에게 “나 어때?” 하고 웃어 보이자,

엄마는 “생각보다 훨씬 시원하고, 잘 어울려”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원장님도 “대부분 눈물을 쏟으시는데… 두 분은 정말 씩씩하시다”고 말했다.


거울 속의 나와 엄마는 울음 대신 웃음을 나눴다.

그 순간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나는 블랙 컬러의 중단발 모자 가발을 선택했다.

모자 가발을 쓰자 생각보다 자연스러워, 거울 속 나를 다시 바라보며 천천히 적응해 갔다.

남편에게 사진을 보내니 “너무 자연스러운데?”라는 답이 바로 왔다.

그 한마디가 든든했다.


엄마와 함께 근처 서문시장을 걸었다.

건어물 가게에서 멸치와 미역을 사고, 내가 좋아하는 납작 만두도 사 먹었다.

우연히 만난 사촌 언니는 “전혀 가발 같지 않다”며 놀라워했다.

그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성공이다, 싶었다.


집에 돌아와 아빠께도 보여드리자,

“우리 딸, 정말 예쁘다”라며 활짝 웃으셨다.

가발을 벗으니 뒤엉킨 머리카락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속이 시원해졌다.

두건도 생각보다 잘 어울려, 조용히 혼자 웃어보기도 했다.

정말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맞다.


지금은 쉐이빙을 한 지 일주일.

모자 가발 덕분에 가족여행도 무사히 다녀왔다.

두건도, 모자 가발도 이제는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아빠가 “우리 딸, 이렇게 예쁜 얼굴인지 몰랐다”고 농담해 주는 순간이 큰 힘이 된다.


머리카락은 잃었지만, 그 자리에 용기와 웃음,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 자랐다.

삶은 때로 예상치 못한 순간을 들이밀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적응하고, 웃고, 다시 살아간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충분하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습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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