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외전] 나의 그로서리 프렌드, 미요

삼계탕을 만드는 일본 엄마와 토시코시 소바를 만드는 한국 엄마

by 유지니안

일본인 친구 미요를 처음 만난 것은, 역시 놀이터에서였다.

DPNS에 가기 전,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딸에게 친구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같이 다니던 놀이터. 데이비스 커뮤니티 파크의 그네와 미끄럼틀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둘째가 엘리와 동갑이었는데, 특히 첫째 히로가 비글처럼 돌아다니는 엘리를 굉장히 신기해했다. 그리고 미요의 두 아들 모두 굉장히 수줍음이 많았다. 여느 일본인들처럼 말이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그녀가 나에게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오늘 삼계탕을 만든다고 했다.

'삼계탕이라니! 일본인이? 아니 무엇보다 삼계탕은 사먹는 거 아니었나?'

그게 나와 미요의 첫 만남이었다.




미요를 만나고 나서, 17년 전 교환학생 시절에 만났던 첫 번째 일본인 친구 마유코가 떠올랐다.

산호세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그녀는 갓 스물을 넘긴 철딱서니 없던 나에게 많은 것을 공유하고 가르쳐주었다. 부모님에게서 떠나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으로 외지 생활을 하던 그 시절, 그녀는 나의 언니이기도, 친구이기도, 엄마이기도 했다. 기숙사와 학교만 다니던 나였는데, 마유코를 만난 이후로 미국 마트에서 같이 장을 보고, 여행까지 함께할 수 있는 소울메이트가 생겼다.


그 당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배우고 자랐다. 일본 문화가 개방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니까. 그런 나에게 해외에서 만난 첫 일본인이었던 마유코는 언제나 상냥하게 도와주었고, 그 덕분에 일본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정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던 나는 미국에서 엄마처럼 마유코를 따랐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는 서로 연락하며 안부를 묻는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해외 생활에서 새로운 일본인 친구, 미요를 만났다.

그녀는 마유코와 비슷한 나이였다. 아마 그래서 처음부터 친근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나와 미요 모두 ‘엄마’라는 것이었다. 학생을 넘어선 다음 단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지원해주는 일이 우리에게 생겼다. 미요는 UC Davis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일본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투영되었다. Bar 시험 준비를 하는 남편, 비자문제로 일도 못 하는 나, 그리고 엘리 육아까지 비슷했다.


알고 보면 일본은 꽤나 우리나라와 닮아 있다. 생각하는 방식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일본 주부의 삶이란, 미국보다 오히려 한국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 그래서였을까? 미요와 나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평소 요리와 식자재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 그녀는 케이티 할머니와는 또 다른 느낌의 스승이었다. 케이티 할머니가 미국식 대용량 요리와 실용적인 살림법을 가르쳐줬다면, 미요는 섬세한 아시아 음식의 세계를 알려줬다. 특히 생선 손질이나 일본 식재료 활용법에서 말이다.

"오늘 트레이더조에 뭐가 새로 들어왔는데 너무 맛있고, 싱싱했어."

"코업에는 뭐가 좋더라."

"오토스 일본 마켓에 이번 달에 뭐가 들어온다는데 같이 가자."

"코스트코 이번 주에 갈래?"

우리는 그야말로 '그로서리 프렌드'였다. 마트 전단지를 뒤적이며 세일 정보를 공유하고, 대용량 제품을 나눠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5년 전 남편을 따라 데이비스에 온 그녀는 그야말로 완벽한 주부였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여권이 낮기도 하고, 결혼을 하면 당연히 직업을 그만두는 문화여서 그런지 우리가 전통적으로 해내는 주부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현모양처였고, 알뜰살뜰했다. 그리고 그 애환을 나와 공유하면서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영화관에서 만나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녀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던 것 같다. 특히 같은 일본인(그러나 그녀는 외국인과 결혼한 일본인은 일본인이라고 아니라고 했다)에게서도 상처를 많이 입은 듯 했다. 덕분에 그녀를 통해서 또 다른 한국인 친구들도 소개받곤 했다.


엘리가 DPNS를 간 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장을 봤다. 코스트코, 트레이더조, 오토스... 우리의 장보기 코스는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제철 생선이 뭔지, 어떤 브랜드의 간장이 좋은지 알려줬다. 나는 한국식 고기 부위와 손질법을 공유했다. 서로가 서로의 선생님이었다.

"이거 반씩 나눠?"

"응, 냉동실에 넣어두면 되니까."

대용량 마트의 묘미는 나눔에 있었다. 6파운드짜리 립아이 스테이크, 24개들이 유기농 계란, 거대한 양배추 한 통.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양이지만, 둘이서는 가능했다. 우리는 늘 지퍼백을 트렁크에 넣고 다녔다. 코스트코 주차장에서 차 트렁크를 열고 정성스럽게 나누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우스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생존법이었다. 비싼 물가에 맞서는 아시안 엄마들의 연대였다.



돌아가는 날이 다가왔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알고보니 이사비용이 더 비쌌던 식탁과 의자, 그리고 베이킹하겠다고 큰맘먹고 구매했던 핸드 믹서기 정도였다.

"이거 써. 우리도 이제 필요 없으니까."

"고마워. 잘 쓸게."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일본 특유의 세심한 포장에 싸인 선물들을 건넸다.

"한국 가서도 가끔 우리 생각해."

"당연하지. 너도 김치찌개 꼭 도전해봐."

"너도 삼계탕 계속 만들어. 이제 프로잖아."

우리는 웃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데이비스라는 낯선 땅에서 만난 두 아시안 엄마. 삼계탕을 만드는 일본 엄마와 토시코시 소바를 만들게 된 한국 엄마.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737일을 함께했다.





2025년, 한국으로 돌아온 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이제는 마트에서 가격표를 원화로 환산하지 않아도 되고, 파운드를 킬로그램으로 변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가끔 이마트나 코스트코에서 대용량 포장을 보면 문득 미요가 떠오른다.

"이거 반씩 나눠?"

그때 우리가 늘 하던 말까지.


삼계탕을 만들던 일본 엄마 미요. 지금쯤 일본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직 데이비스에 있을까. 어디에 있든 여전히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라고 묻고 있겠지.

핸드폰을 꺼내 와츠앱을 켰다. 미요의 프로필 사진은 여전히 데이비스 파머스 마켓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오랜만에 보내는 메시지. 하지만 그녀도 웃으며 답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