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기를 마치며

by 유지니안

안녕하세요. 유지니안입니다.


드디어 우리 가족의 737일, 그 대장정이 끝났습니다.

학생으로 다녀왔던 미국이 설렘 가득한 '모험'이었다면, 아내이자 엄마로 다시 찾은 미국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17년 전 '모험' 속에서 넓은 세상과 나의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면, 이번 '투쟁'을 통해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저력과 힘, 그리고 용기를 배웠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긴 글의 시작은 남편을 향한 저의 소리없는 아우성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남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연으로 나아가는 동안, 저는 기꺼이 이름 없는 조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연의 희생은 시부모님과 남편에게 너무나 쉽게 당연한 것이 되더군요.

남편의 미국 변호사 시험 합격이라는 기쁨 뒤에 밝혀진, 저의 기여도는 49%에 불과하다는 평가. 그 순간, 제가 묵묵히 감내했던 시간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저는 F-2 '시체 비자'라는 멍에 속에서 학업의 꿈을 접어야 했고, 낯선 땅에서 홀로 아이를 돌보며 수백 개의 도시락을 쌌건만...


말로는 전할 수 없었던 그리고 소중한 제 추억을 글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SNS를 잘 하지 않는 저에게 제 이야기를 쓴다는게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17년 전 학창 시절의 소중했던 미국 경험이 사진 한 장, 기록 한 줄 없이 기억 속 먼지로만 남아버린 아쉬움. 이번 2년의 기억마저,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투했던 저의 시간마저 그렇게 사라져버릴까봐 용기를 내어 펜을 들었습니다.


매일 한 편씩 글을 쓰는 일은 벅찼습니다. '차라리 누가 CCTV로 우리 삶을 찍어줬으면' 하는 엉뚱한 상상도 많이 했었죠. 그래도 글을 쓰다보니 헝클어졌던 감정들, 흩어졌던 기억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길 가다 도랑에 빠지고, 세탁기 하나 때문에 3,000달러를 날리고, 은근한 차별에 속상해하면서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내는 법을 배웠던, 그 소중한 경험들... 그 경험들이 비로소 활자가 되어 내 마음에, 그리고 세상에 새겨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글에 공감해주시는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멍투성이였던 마음이 차츰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는 압니다. 글쓰기가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요. 그래서 앞으로도 제 삶의 조각들을 꾸준히 기록해나가려 합니다. 더 나아가, 저처럼 조명받지 못하는 조연들, 특히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지운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이방인-데이비스 737', 그 긴 여정을 함께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유지니안 올림




p.s.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의 후기도 궁금하실 것 같아요.


처음에 엄마 집에 도착하니, 온 몸의 긴장이 툭 풀리더라구요. 드디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온 느낌. '모든 힘든 건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새로운 난관들이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한달만에 회사에 복직했는데 문서는 눈에 하나도 안들어오고 웰컴홈이라고 사람들이 반겨줄 줄 알았는데.. 그건 저의 큰 오산이였어요. 그 와중에 모두 다 왜 이렇게 아픈지... 미국에 있던 2년보다 한국에 돌아오고 반년 동안 더 많은 전염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휴직은 했는데 애를 보는 건 서투르고...


그렇게 귀국 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문득 2년 전의 저를 돌아봅니다.

공용 세탁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남의 빨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저, 19리터짜리 물통을 낑낑대며 2층 계단을 오르던 남편...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얼마나 사소한지요.

세탁기 버튼 하나, 정수기 레버 하나에 감사할 수 있게 된 지금의 저는, 분명 2년 전의 저보다 더 단단하고 너그러워졌습니다.

미국에서의 737일은 제게 그런 드넓은 마음, 호연지기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삶의 고단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제 저는 자부할 수 있습니다. 2년 전의 저보다 더 커졌고, 더 자랐다는 것을요. 앞으로 또 어떤 도랑(ditch)이 제 앞을 가로막을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습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나아갈 힘이 제게는 생겼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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