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그 여름, DPNS 앞에서

영어 한 마디 못해도 괜찮아

by 유지니안

엘리가 내 다리 뒤에 숨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아, 괜히 신청했나?'

DPNS Mini Summer Camp 첫 날부터 위기 발생.




8월의 뜨거운 화요일 아침, 소풍이라도 가듯 설레는 마음으로 DPNS Danbury 캠퍼스로 향했다. 화요일과 목요일, 2주 동안 4번 있는 Mini Summer Camp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Mini Summer Camp의 특별한 점은 drop-off가 안 되서 부모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50달러라는 저렴한 비용도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DPNS 정규 프로그램으로 가는 첫 관문이었다.


Danbury 캠퍼스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담했다. 원룸 크기의 교실 하나와 놀이터로 이루어진 단출한공간. 하지만 놀이터만큼은 압권이었다. Water table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고, 아이들 키에 맞춰 만든 미니 도로와 자동차 장난감들, 실제 모래가 담긴 커다란 sandbox, 그리고 미끄럼틀과 그네까지. 2-3살 아이들에게는 천국같은 공간이었다.

"Welcome! You must be Ellie's family!"

메인 티처인 Trudi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은발의 머리와 따뜻한 미소가 인상적인 그녀는 첫눈에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임이 느껴졌다.

9시가 되자 Circle time이 시작되었다. 다같이 둥글게 모여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는 시간.

"Good morning, good morning, how are you today?"

은발의 Trudi 선생님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신나게 따라 부르는데, 우리 엘리만 내 등 뒤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놀이터에서는 그렇게 씩씩하게 놀던 아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It's okay, Ellie. You can just listen today."

Trudi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나는 더 미안해졌다. 다른 엄마들의 시선이 느껴졌달까. '저 아이는 왜 저러지?' 하는 것 같아서. 피해의식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랬다.

Circle time이 끝나고 자유놀이 시간. 다른 아이들이 블록이며 퍼즐을 가지고 놀 때도 엘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옆에 딱 붙어서 다른 아이들을 구경만 했다.

'이러다가 정규 프로그램은 꿈도 못 꾸겠네.'


그때였다. 아침부터 말썽이던 수조에 물이 다 채워졌다.

"Okay everyone! Water time!"

Trudi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엘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물? 물놀이?"

엘리는 물을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느새 Water table로 달려나가 플라스틱 배를 띄우고, 물컵으로 물을 붓고 떠내며 까르르 웃는 엘리. 다른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Look! My boat is fast!"

금발의 남자아이가 영어로 말을 걸자, 엘리도 어눌하지만, 그리고 엉뚱하지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배 멋지지!"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대화였지만, 아이들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에게는 함께 놀 수 있는 '그 무언가'만 있으면 언어 따위는 장벽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엘리는 조금씩 변해갔다. 여전히 Circle time에는 쭈뼛거렸지만, 적어도 내 뒤에 숨지는 않았다. "Wheels on the Bus"가 나오면 아주 작은 목소리로나마 따라 불렀다.

무엇보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More water, please!" "My turn!" "No, no, no!"

문법은 엉망이고 발음도 이상했지만, 그래도 시도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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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Mini Summer Camp에는 숨겨진 함정(?)이 있었다. 부모도 일을 해야 한다는 것. co-op 시스템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었다. Set-up, Clean-up, 그리고 잡무(a task)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Set-up은 아침 8시 45분에 미리 도착해서 장난감을 꺼내 배치하고, 밤새 떨어진 나뭇가지를 치우는 등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Clean-up은 수업이 끝난 11시 45분부터 흩어진 장난감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 그리고 잡무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 플레이도우를 만들거나, 놀이 과정에서 더러워진 수건이나 천을 집에 가져가 세탁해 오는 일 등이었다.


우리 가족은 set-up을 담당하게 되었다. 매 수업일마다 일찍 도착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축복이 되었다.

조용한 아침 시간, Trudi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가끔 일찍 오는 다른 가족들과 스몰토크를하며 DPNS와 데이비스에 대한 살아있는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근처에 괜찮은 소아과 어디 있어요?"

"Farmer's Market은 꼭 가보세요. 수요일이랑 토요일에 열어요."

"겨울에는 비가 많이 와서 우산 꼭 준비하세요."

이런 소소하지만 실생활에 꼭 필요한 팁들이 오가는 시간이었다.




마지막 수업일인 8월 11일.

엘리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물놀이가 아니라도 활발하게 놀기 시작한 엘리. 어느새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비록 영어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그때 Trudi가 다가왔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긴장했는데, 그녀의 다음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엘리가 정말 많이 성장했어요. 처음엔 걱정했는데... 5-day 프로그램에 지원해보는 게 어때요?"


5-day 프로그램?

우리가 그토록 원했지만 '아직은 무리겠지' 하고 포기했던 바로 그것. 주 5일, 매일 아침 8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엄마 없이 혼자 다녀야 하는 진짜 프리스쿨.

"하지만... potty training이 완벽하지 않은데..."

사실 이게 제일 걱정이었다. 엘리는 대부분은 괜찮았지만 가끔 실수를 했다. 특히 놀이에 집중하다 보면.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아이들은 또래를 보면서 더 빨리 배워요."

Trudi의 확신에 찬 목소리. 그리고 덧붙였다.

"Teacher Becky가 담당하실 거예요. 정말 경험이 많으신 분이라 걱정 마세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DPNS 웹사이트에 들어가 가을학기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순위: 5-day 프로그램 2순위: 3-day 프로그램 (혹시 모르니까)

Submit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제발... 제발 5-day에 붙게 해주세요.'

일 년처럼 느껴질 일주일이었다.




단돈 50달러로 시작한 Mini Summer Camp. 엘리가 물놀이에 미쳐있다는 걸 확인한 2주. 그리고 예상치 못한 5-day 프로그램 추천까지.

가끔 인생은 이런 선물을 준다. 작은 시작이 큰 기회로 이어지는 순간들. 우리에게 그 여름의 Mini Summer Camp가 그랬다.

창밖으로 8월의 뜨거운 태양이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 하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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