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교사로 참여하는, 낯설고 특별한 프리스쿨
3월의 어느 날, 페이지 엄마 제시가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다.
"저번에 이야기했던 DPNS 기억나요? 이번 주말에 Open House 해요. 제가 거기서 volunteer로 도와주거든요. 관심 있으면 꼭 와보세요!"
DPNS. Davis Parent Nursery School.
부모들이 조합원처럼 참여해서 함께 운영하는 협동조합형 어린이집.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가 '보조 교사'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아직 영어가 서툴고 분리불안이 남은 엘리에게는 그 어떤 비싼 사립 유치원보다 완벽한 환경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페이지가 이미 다니고 있다는 사실. 그게 가장 큰 확신을 주었다.
하지만 주변 한국인 엄마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Co-op은 부모가 너무 많이 참여해야 돼요. 미국까지 왔는데 좀 더 즐겨요. 저희는 ESL 같이 다니고 있는데, 혹시 관심 있어요?"
"영어 못하는 아이들한테는 좀 힘들 수도... 선생님들이 한국어를 전혀 안 쓰니까."
"duty day라고 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한다고요? ...차라리 비싸도 일반 프리스쿨이 편하겠어요."
순간 내 마음속 깊이 잠들어있던 반골 기질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Why not?' 한국처럼 생활할 거면 왜 굳이 이역만리를 날아왔겠는가. 15년 전 교환학생 때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았고, 그때 그런 도전을 했다면 지금은 왜 못하겠는가!
주말 오후,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DPNS로 향했다. 캠퍼스 입구에서 제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왔네요! 여기가 8th street 캠퍼스예요. 5일반이 있는 곳이죠. 페이지는 여기 다녀요."
1949년에 설립된 이곳은 단순한 어린이집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커뮤니티였다. DPNS를 졸업한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 다시 자녀를 DPNS에 보내고, 다시 그 손자도 DPNS에 다니는. 그래서인지 이곳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가는 공동체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놀이터를 둘러보니 부모들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아이들이 앉는 작은 의자부터 커다란 창고까지, 모두 부모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 놀이터 한편의 자전거와 짚라인도 마찬가지.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부모들이 주말마다 모여 망치질하고 페인트칠하며 만들어낸 결과물들이었다. 놀이터 한 가운데에는 1949년이라고 새겨진 작은 머릿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제시의 안내로 프로그램 디렉터를 만났다. 내 마음속 엘리는 이미 5일반이었다.
'5일반에는 페이지도 있어서 적응하기 쉬울 거야. 게다가 3일반은 더 멀리 떨어진 Danbury로 가야 한다고.'
하지만 디렉터의 생각은 달랐다. 엘리가 아직 2살 반이고 영어가 서툴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5일반에 적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페이지도 처음엔 3일반이었다가 지금은 5일반에 다닌다고 하면서. 주저하는 나에게 디렉터는 차분하게, 하지만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듯이 제안해왔다.
"일단 8월에 있는 Mini summer camp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요? 2주 프로그램인데, 주 2일만 나와요. 엘리한테 적응 부담이 적을 거예요. 아이가 어떻게 적응하는지 보고 결정하도록 하죠."
엘리가 5일반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는지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 놓칠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복잡한 심정이었다.
내가 원했던 것과는 다른 출발. 하지만 적어도 시작점은 찾았다. 무엇보다 엘리가 페이지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첫술에 배부른 게 어딨어? 천천히 가면 되지.'
그날 밤, 잠든 엘리를 보며 생각했다. 급하게 가다가 아이가 상처받는 것보다는 천천히 적응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욕심이 꿈틀거렸다. Mini Summer Camp에서 잘하면, 가을에는 5일반도 가능하지 않을까?
Open House가 제시가 끝나고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여기는 단순한 어린이집이 아니에요. 가족이 되는 곳이죠. 기대하세요!"
과연 그럴까? 이 낯선 시스템이 우리에게도 가족 같은 공간이 될 수 있을까?
8월이 빨리 오기를, Mini summer camp가 시작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협동조합형 어린이집(Co-op Preschool)
부모가 단순한 '고객'이 아닌 '파트너'가 되는 독특한 교육 시스템. 캘리포니아에만 100개가 넘는 협동조합 어린이집이 있으며, 대부분 1940-50년대에 설립되어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부모 참여를 통해 학비를 일반 사립 어린이집의 절반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
부모 참여 활동:
- 일주일에 한 번 duty day에 보조교사로 활동
- 연 2회 토요일 maintenance day 참여 (시설 청소 및 정비)
- 매달 parent meeting 참석
- 각종 위원회(fundraising, social events 등)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