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엄마도 아무 말 안 했잖아

우리 아이가 부당한 일에 참는 걸 배운 이유

by 유지니안

DPNS carpool 제안을 거절한 이후로도 제시와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평온했다. 여전히 놀이터에서 만났고, 아이들은 변함없이 잘 놀았다. 하지만 뭔가 미묘하게 자꾸 신경이 거슬리게 하는 행동들이 눈에 밟혔다.


9월 어느 주말, 제시네 가족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을 때의 일이다. 엘리가 DPNS 5일반에 합격한 기쁨도 나누고 싶었고, 그동안 제시네 집에서 받은 환대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준비했다. 김밥 두 줄, 떡볶이 한 솥, 잡채, 그리고 디저트로 호떡까지. 작은 아파트지만 최대한 깨끗이 치우고,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장난감도 거실에 정성껏 배치했다. 더운 여름날 좁은 아파트에서만 놀 수 없으니까, 아파트 내에 있는 수영장에서 애들이 놀 수 있게 수영복도 준비해 오라고 이야기해 두었다. 애들이 놀다가 먹을 수 있도록 남편을 시켜서 수박도 미리 다 썰어 두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Hi! Come in!"

밝게 맞이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제시의 손이 텅 비어있었다. 애론도, 아이들도 마찬가지. 그냥 몸만 달랑 왔다. 미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으면 와인이든, 디저트든, 꽃이든 뭔가를 가져가는 게 예의다. 특히 식사 초대라면 더더욱. 우리도 제시네 집에 갈 때마다 정성껏 한국 음식을 만들어갔었다.

"와! 맛있겠다!"

제시는 아무렇지 않게 식탁에 앉았다. 마치 레스토랑에 온 것처럼.

식사 내내 남편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점심을 마치고 애들과 함께 수영하러 가는 길에 미리 준비해 둔 간식과 수박을 가지고 나갔다.

'그래도 뭔가 준비해왔겠지.'

'수영하면서 먹으려고 간식을 사 오지 않았을까?'

'아마 차에 두고 왔나 보다.'

하지만 결국 제시네 가족이 준비해 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시네 가족과 헤어진 후, 남편이 조용히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시네는 왜 맨날 빈손으로 와? 우리는 항상 뭔가 만들어서 가는데."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제시네 집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페이지가 던진 공이 엘리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아야!"

엘리가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코가 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제시가 페이지를 혼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Say sorry to Ellie"라고는 하겠지.

그런데...

"Oh, it's okay! They're just playing!"

제시는 그저 웃으며 넘어갔다. 페이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울고 있는 엘리를 향해 "You're okay, sweetie!"라고만 했다.

나는 엘리를 안아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엘리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는데? 페이지는 여전히 공을 들고 있으면서도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페이지야, 엘리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페이지가 아닌 제시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Oh, she didn't mean to! Kids will be kids, right?"


실수였든 아니든, 친구를 다치게 했으면 사과하는 게 먼저. 그것이 만국 공통의 기본 예의 아닐까? 무엇보다 화가 났던 건, 'Kids will be kids'라는 그 말이었다. 그건 피해를 입은 쪽에서 '괜찮아요, 애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라고 너그럽게 받아줄 때 쓰는 말이지, 가해자 부모가 먼저 꺼내는 변명이 아니었다.

'이게 미국식 육아인가? 아니면 그냥 제시네 방식인가?'

의아했지만, 남의 집 교육 방식에 뭐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제시의 육아 방식을 다시 보게 되었다. 과연 페이지가 다른 백인 아이를 때렸어도 그렇게 넘어갔을까?




우리 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페이지가 엘리의 장난감 축구공을 가지고 놀다가 집에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푹신푹신한 작은 공으로, 엘리가 매일 집에서 차고 다니는 애착 장난감이었다.

당연히 제시가 페이지에게 안된다고, 나중에 사준다고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제시는 "Oh, ask Ellie's mom!"라고 하는 게 아닌가. 마치 내가 당연히 줄 거라는 듯이.

"미안한데, 이건 엘리가 정말 아끼는 거라서..."

내가 조심스럽게 거절하자 페이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시가 말했다.

"Really? She just loves it so much..."

그 '그냥(just)'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그냥 공이 아니라 엘리의 공인데 말이다.


제시와 페이지가 떠난 후, 엘리가 공을 찾기 시작했다. 거실 구석구석, 침실, 화장실까지. 아무리 찾아도 그 축구공은 없었다. 그날 페이지가 보여준 집착이 떠올랐지만, 엘리에게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며칠 후 제시네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공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혹시 똑같은 걸 새로 산 것 아니냐고? 그 축구공은 한국에서 가져온 거였다. 미국 장난감들이 다 큼직한 것과 달리, 엘리 손에 딱 맞는 아담한 크기였다. 똑같은 걸 여기서 구할 수도 없었다.

순간 배신감이 밀려왔다.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가져간 건가? 아니면 페이지가 실수로 가방에 넣었는데 제시가 돌려주지 않은 건가? 어느 쪽이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걸 제시에게 이야기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 미국에서 처음 사귄 친구와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왜 제시는 딸에게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더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을까. 그 찜찜함과 배신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엘리는 그 장난감 축구공이 왜 페이지 집에 있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단지 '엘리가 상처 입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만 생각했다.

나중에, 결국 제시와 페이지와의 인연이 끊긴 이후, 엘리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예전에 축구공 기억나? 그거 페이지가 가져간 거 같아."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엄마도 아무 말 안 했잖아."


엄마가 당하고도 참으면, 그걸 보고 자란 내 딸이 같은 일을 당해도 참는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게 된다. 나는 뒤늦은 후회와, 반성과,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미안해... 다시는 엘리가 이런 일 당하지 않도록 엄마가 잘할게!"


미국의 Potluck 문화와 Hosting 예절
미국에서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으면 'hostess gift'를 가져가는 것이 기본예절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더 엄격할 정도. 와인, 꽃, 디저트, 혹은 수제 요리 등이 일반적이다. 특히 식사 초대의 경우, 음식을 가져가거나 "What can I bring?"이라고 묻는 것이 예의다. 단, 문화적 배경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일부 미국인들은 "Just bring yourself"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함
- 하지만 정기적으로 만나는 관계에서 계속 빈손으로 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음
- 특히 상대방이 항상 무언가를 준비한다면, 호혜성(reciprocity)이 기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