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눈 앞에서, 나는 드디어 참지 않았다
내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제시와 페이지는 점점 더 선을 넘고 있었다.
레고랜드에서 우리를 인스타 배경으로만 이용한 것부터 시작해서, 빈손으로 와서 받아먹기만 하는 것, 엘리의 장난감을 몰래 가져가는 것까지. 하나하나는 '실수'나 '문화 차이'로 넘길 수도 있었지만, 모든 일이 쌓이니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를 '친구'가 아닌 '이용 가능한 존재'로 보고 있었다.
날씨 좋은 토요일, West Manor Park에서 두 가족이 함께 피크닉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김밥과 과일을, 그들은 샌드위치를 준비해왔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빠!"
엘리가 남편 무릎에 앉으려는 순간, 페이지가 재빨리 달려와서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제시가 제지할 법도 한데, 그녀는 그저 미소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5살 여자아이가 친구 아빠 무릎에 앉는 것. 미국에서는 이런 스킨십을 굉장히 조심스러워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남편이 당황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살짝 밀어내며 엘리를 불렀지만, 이미 엘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내가 당해도 헤헤 웃으며 참으니까, 우리 가족 전체를 만만하게 보는 걸까.'
그날 밤, 남편과 긴 대화를 나눴다. 남편도 그날 피크닉에서 있었던 일이 너무 당황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정말 불편했어. 엘리가 오려고 하는데 페이지가 막 밀치고 올라와서... 근데 제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는 차마 남편에게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레고랜드에서 우리를 배경 삼아 사진만 찍고 사라진 일, 우리를 베이비시터 겸 카풀 기사로만 생각한 일, 우리는 항상 음식을 만들어가는데 그들은 늘 빈손인 일, 페이지가 엘리 축구공을 가져간 일까지.
남편은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페이지네와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것 같아. 엘리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지 않고."
"그래도 엘리는 페이지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게 문제였다. 엘리에게 페이지는 여전히 최고의 친구였다. 하지만 부모로서 이런 불균형한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됐다.
'천천히 거리를 두자. 자연스럽게.'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운명은 그런 유예를 허락하지 않았다.
9월의 마지막 토요일, DPNS에서 함께 사귄 Maria의 생일 파티가 있었다. 엘리는 미국에서 처음 가보는 생일 파티에 설레있었다. 생일 선물로는 Maria가 좋아하는 Paw Patrol 책을 준비했다.
생일 파티는 DPNS yard에서 열렸다(주말에는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공간을 빌릴 수 있다). 큰 트램폴린과 작은 물놀이 기구, 그리고 페이스 페인팅 부스까지. 아이들을 위한 완벽한 파티였다.
케이크를 자르고 난 후, Maria의 엄마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했다.
"Maria이 친구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대요!"
보통 생일 파티에서는 주인공이 선물을 받는데, 거꾸로 친구들에게 선물을 준다니. 신선했다.
Maria이 하나하나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작은 선물 봉투를 나눠줬다. 엘리 차례가 되자, Maria이 환하게 웃으며 분홍색 봉투를 건넸다.
"엘리! This is for you!"
엘리가 신나서 봉투를 열어보니 반짝이는 스티커 세트가 들어있었다. 유니콘과 무지개가 그려진, 엘리가 좋아할 만한 스티커였다.
"와! 예쁘다!"
엘리가 스티커를 꼭 쥐고 행복해했다.
생일파티 구디백(Goodie Bag)은 미국에서 시작된 파티 문화로, 생일 주인공이 파티에 온 친구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나눠주는 작은 선물 봉투를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어린이 생일파티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고, 보통 사탕이나 작은 장난감을 담아 나눠준다.
한국에서는 아직 보편적이지 않지만, 최근 들어 일부 부모들 사이에서 '리턴선물'이나 '답례품'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시도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미국처럼 당연한 문화로 자리잡지는 않았고,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부모들도 많은 편.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엘리가 울면서 나에게 달려왔다.
"엄마! 내 스티커 없어졌어!"
"어디 뒀는데?"
"테이블에 놨는데... 페이지가 내 거 가져갔어."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또?
평소였다면 '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 '다른 데 놨나보다'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나는 엘리가 더 이상 이런 부당한 일을 그냥 참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엘리야, 정말로 페이지가 가져간 거 봤어?"
"응! 페이지가 '이거 예쁘다' 하면서 가져갔어."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제시에게 다가갔다.
"제시, 혹시 페이지가 엘리 스티커를 가져간 것 같은데..."
제시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What? No way. 페이지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엘리가 분명히 봤다고 하는데요."
"Kids get confused all the time. 엘리가 잘못 본 거겠죠."
그 순간, 제시가 나와 엘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듯이.
"그럼 페이지 가방만 한번 확인해봐요. 실수로 들어갔을 수도 있잖아요."
내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Maria의 엄마와 다른 부모들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필요까지 있나요?" 제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Maria의 엄마가 나섰다.
"한번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이들은 가끔 실수하니까요."
마지못해 제시가 페이지의 가방을 가져왔다. 그리고 지퍼를 여는 순간...
분홍색 봉투가 그대로 들어있었다. 엘리의 유니콘 스티커가 든 바로 그 봉투.
침묵이 흘렀다.
"I'm... sorry."
제시가 겨우 내뱉은 사과.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알 수 없었다.
"실수였을 거예요. 페이지야, say sorry to Ellie."
하지만 페이지는 여전히 뻔뻔한 표정이었다. 제시는 서둘러 페이지의 손을 잡고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엘리에게 말했다.
"엘리야, 오늘 엄마한테 말해줘서 고마워. 페이지가 네 물건을 가져가는 건 잘못된 거야.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꼭 엄마한테 말해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야. 알았지?"
"응..."
"그리고 페이지는 좋은 친구가 아닌 것 같아. 친구라면 네 물건을 훔쳐가면 안 돼."
그날 이후로 우리는 제시네 가족과 완전히 연을 끊었다. DPNS에서 마주쳐도 인사만 간단히 하고 지나갔다.
처음엔 서운했다. 데이비스에서 처음 사귄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에서 벗어났고, 엘리도 진짜 친구가 무엇인지 배워가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제시네 가족은 다른 한국인 가족과도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그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의 길을 가게 되었다.
가끔 엘리가 페이지를 그리워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엘리에게 말했다.
"진짜 친구는 네 것을 빼앗지 않아. 너를 아프게 하지도 않고. 그런 친구를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서 엘리는 더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서로를 존중하고, 나누고, 배려하는 진짜 친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