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 알베르 카뮈
학창 시절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확연히 알 것 같다.
그때는 나 자신이 ‘이방인’이어서 그랬다. 이방인이 이방인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나이 들어 서서히 이방인에서 빠져나오면서 카뮈의 이방인이 이해되었다. 뫼르소가 내 주변에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와 닿는다.
뫼르소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들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세상에 대충 맞춰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불화는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는 거대한 율법이 있다. 자라면서 내면 깊이 속속들이 스며든 율법.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그 율법이 버겁다.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척해야 하고, 항상 쇼를 해야 하는 삶은 얼마나 힘이 드는가! 무리지어 다니는 짐승들처럼 살 수 없는 뫼르소는 세상에 무관심해 보이고 냉정해 보인다.
그가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나무그늘로 발걸음을 옮길 때, 아랍인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가 그들을 노려보자, 아랍인의 손에 쥔 칼에서 하얗게 번쩍이는 햇살이 그의 눈을 찔렀다.
그때 켜켜이 쌓여온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서로 존중하고 살지 못하는 거야?’
그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그의 ‘죽음의 본능(타나토스)’도 함께 솟구쳐 올라왔을 것이다.
사람은 사는 게 너무나 힘이 들면 죽고 싶어진다. 죽어 천지자연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가!
그는 재판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에 무관심하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 것! 좀 더 일찍 죽는 것뿐이지 않는가?
카뮈는 감방에 있는 뫼르스를 다음과 묘사한다.
‘감방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감방 창으로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생과 깊이 교류하는 자신,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존재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는 인간의 율법으로 시들어진 이 세상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세상을 본 것이다. 그가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삶도 온전해진 것이다.
그는 율법의 대표자로 면회를 온 신부를 거절한다. ‘그 신부는 꼭 송장 같아!’ 뫼르소의 온 몸은 지금 생명의 환희로 춤추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자신을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는 생각한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거대한 공장의 기계처럼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기계부품의 삶을 살 수 없어 이방인이 된 뫼르소.
그는 이제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도 다정하게 보게 된 것이다. 그들 곁에서 죽어 가면 외로움을 덜 느끼리라고 생각하면서.
태양의 기억이 가슴속에 흐려져 간다.
풀은 바래지고.
간신히
이른 눈발이 바람에 날린다.
좁은 운하는 벌써 흐르지 않고
얼어붙은 물.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
아, 아무 일도.
〔......〕
태양의 기억이 가슴속에 흐려져 간다.
이건 무엇? 어둠?
아마도!……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올 수 있다.
- 안나 아흐마토바, <태양의 기억이> 부분
니체는 ‘위대한 정오의 시간’을 말한다. 그림자가 없는 태양의 시간. 태양이 세상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시간.
뫼르소는 ‘태양의 기억’을 간직하며 죽어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