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게 살아라
위험하게 살아라. 당신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 세워라. 당신의 배를 미지의 바다를 향해 띄워라.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싸우며 살아라. - 프리드리히 니체
다시마 세이조의 그림책 ‘뛰어라 메뚜기’는 위험하게 살아가는 메뚜기 한 마리를 보여준다.
‘조그마한 수풀 속에 메뚜기 한 마리가 숨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무서운 녀석들이 메뚜기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메뚜기는 날마다 날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살았습니다.’
메뚜기는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날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간이 콩알만 해져 버렸다.
‘그래서 어느 날 메뚜기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습니다. 메뚜기는 커다란 바위 꼭대기로 나와 대담하게 햇볕을 쬐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하면 금방 남의 눈에 뜨여 잡아먹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에요.’
누구나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위험하게 살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도 짐승이라 안락하게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위험하게 살아야 한다. 위험하게 살지 않으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의 무의식이 사고를 부른다.
우연히 일어나는 듯이 보이는 사고도 우리의 심층의 무의식이 스스로 원하여 일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가정주부가 평소처럼 마트에 다녀왔다가 아이가 보는 앞에서 창가로 가 12층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하지 않는가?
안일한 삶은 우울증을 부르고 우울증은 사고를 부르는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죽음을 향한 충동이 늘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삶과 죽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우주의 춤이다. 우주 차원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하나다.
메뚜기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뱀이 메뚜기를 먹으려는 바로 그때 사마귀도 메뚜기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메뚜기는 있는 힘을 다해 펄쩍 뛰었습니다. 그 바람에 뱀은 온몸이 우그러지고, 사마귀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거미와 거미줄은 뒤죽박죽이 되었고요.’
〔......〕
‘메뚜기는 자기의 등에 있는 네 장의 날개가 생각났습니다. 날개를 써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지만요. 이제는 살길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메뚜기는 온 힘을 다해 날갯짓을 했습니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면서 위로 떠올랐습니다.’
메뚜기는 본능적으로 사즉생(死卽生 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을 알았던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라 죽음을 선택하면 삶이 함께 오는 것이다.
아마 메뚜기의 깊은 내면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뛰어라 메뚜기!’ 우리는 항상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소리는 ‘천지신명 天地神明 하늘과 땅의 조화를 주재하는 온갖 신령’의 소리다. 온 우주가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소리다.
‘메뚜기는 높이높이 날았습니다. 자기 날개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바람을 타고 날아갔습니다.’
메뚜기는 이제 장자가 말하는 ‘대붕’이 되었다. 천지자연의 바람을 타고 가니 대자유다.
세상이 약육강식으로 보이는 건, ‘나’라는 자아에 갇힌 눈으로 세상을 봐서 그렇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는 나를 한순간에 벗어버린다.
나라는 게 없으니 너도 없고, 만물은 하나가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도 사라진다. 오로지 천지자연의 신명나는 춤이 있을 뿐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소리친다. “먼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 내면의 ‘자기(self)’는 영원불멸이다. 위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멸하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놓으라!’고 한다. 손을 놓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건, 나라는 허상에 갇힌 자아뿐이다.
언제부터인지 내 가슴속엔 공포에 떠는 토끼가 살았어
오지 않을 사냥꾼을 기다리며
조금씩 심장이 작아지는 토끼가 살았어
언제부터인지 토끼 속엔 사냥꾼이 살았어
오지 않을 토끼를 기다리며
매일 사격연습을 하는 사냥꾼이 살았어
- 성미정, <어린 병원> 부분
우리 안에는 ‘언제부터인지 내 가슴속엔 공포에 떠는 토끼가 살았어’ ‘언제부터인지 토끼 속엔 사냥꾼이 살았어’
우리는 언젠가부터 ‘토끼와 사냥꾼의 끝없는 윤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