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

by 고석근

모험


살아가기 어려운 세월들이 부닥쳐올 때마다 나는 피곤과 권태에 지쳐서 헙수룩한 술집이나 기웃거렸다. 거기서 나눈 우정이며 현대의 정서며 그런 것들이 뒷날 내 노트에 담겨져 시(詩)가 되었다. - 김수영


마이클 로젠 작가의 ‘곰 사냥을 떠나자’는 신나는 그림책이다. 화창한 어느 날, 일 가족이 곰 사냥을 떠난다.

‘곰 잡으러 간단다. 큰 곰 잡으러 간단다. 정말 날씨도 좋구나! 우린 하나도 안 무서워.’


‘어라! 풀밭이잖아! 넘실대는 기다란 풀잎. 그 위로는 넘어갈 수 없네. 그 밑으로도 지나갈 수 없네.’ ‘아 아니지! 풀밭을 헤치고 지나가면 되잖아!’


흥에 겨운 곰 사냥 출전이다. 도시에서 안락하게 살던 가족들이 곰 사냥을 떠나며 가슴에서 사냥의 본능이 솟아올라오는 것이다.


곰은 오랫동안 백수의 왕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지구 곳곳에 살면서 많은 신화에 등장했다.


원시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곰은 많은 신화에서 인간과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과 곰은 서로의 먹거리였다. 원시인들은 사냥을 할 때는 동물의 신에게 허락을 받았다.


허락을 받은 수만큼만 사냥을 하고, 사냥한 동물들은 의례를 통해 그들의 살은 먹고 뼈와 가죽을 남겨 다시 몸을 얻어 부활하기를 기원했다.


원시인들의 수만 년 동안의 수렵생활은 현대인의 무의식에 깊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동물들과의 목숨을 건 사투, 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놀이야말로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 신명을 잊지 못해 현대 문명인들은 도박을 하고, 번지 점프를 하고, 오토바이 폭주를 해야 한다.


‘사각 서걱! 사각 서걱! 사각 서걱!’ ‘곰 잡으러 간단다. 큰 곰 잡으러 간단다. 정말 날씨도 좋구나! 우린 하나도 안 무서워.’


넘실거리는 강물을 건너고, 깊고 질척이는 진흙탕을 정면 돌파하고, 엄청나게 울창한 무서운 숲을 헤쳐 나간다.


그러다 높은 산중에서 눈보라를 만난다. ‘어라! 눈보라잖아! 소용돌이치는 눈보라. 그 위로 넘어갈 수 없네. 그 밑으로도 지나갈 수 없네.’


용감한 일가족은 함께 전진한다. ‘아, 아니지! 눈보라를 헤치고 지나가면 되잖아! 휭 휘잉! 휭 휘잉! 휭 휘잉!’

드디어 곰이 살고 있는 커다란 동굴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간다. ‘살금! 살금! 살금! 어라, 저게 뭐지?’


‘반들반들하고 촉촉한 코가 하나! 털이 덥수룩한 커다란 귀가 둘! 크고 번들거리는 눈이 둘!’ ‘으악, 곰이잖아!!!’


곰을 만난 일가족은 부리나케 도망을 친다.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드디어 도착한 집, 그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중얼거린다.


‘다시는 곰 잡으러 가지 않을 테야.’


이렇게 문명인 일가족의 모험은 끝난다. 위험하지 않은 모험. 하지만 인간이 이렇게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모험하지 않는 그날이 그날인 삶에는 깊은 권태가 온다. 우울증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천지자연의 경이로움 속에 살았던 원시인들의 경외감을 회복해야 한다. 그들의 모험은 경이로움의 일부였다.


원시인들이 가졌던 섬세한 예술적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오감을 다 깨우고 세상을 바라보면 삼라만상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


문명이 주는 안락함에 젖어 살게 되면, 신나지 않는 마음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에 빠져든다.


온갖 파괴적인 대중문화를 좋아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악마로 변신하여 이 세상에 출몰하게 된다.


모험이 사라진 현대문명은 아슬아슬하다. 우리가 소소한 일상에서 기적을 찾지 못하면, 현대문명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수 있다.



아 듣기 싫어라

어디서 권태가 내 목소리로 징징대는 소리


콩깍지만한 무책임도 없이

참신한 불행도 없이

김치같이

수박껍질같이 둔, 탁, 한 행복들이 집집마다 모여 있는 것도

상쾌하지 않다


- 김경미, <일상> 부분



‘일상’은 ‘참신한 불행도 없이’ 지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팔에 칼을 긋는다. 달려오는 차에 뛰어든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에, 술에, 마약에 취해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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