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그냥 존재함의 차원에서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 임마누엘 레비나스
우리는 간간이 층간소음 문제로 인한 여러 참혹한 사건들을 접한다. 층간소음으로 마음고생을 해본 사람들은 그런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층간소음 문제만 말끔히 해결하면, 우리는 더 이상 마음고생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엘리자베드 슈티메르트 작가가 지은 그림책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를 읽으며 생각한다.
삼층에 새로 이사를 온 가족, 새집은 근사했고 가족들은 너무 기뻐서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웠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아래층에서 올라온 할머니가 화를 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예요? 천장이 다 무너지겠어요.”
위층 아이들은 생쥐처럼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래층 할머니는 위층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자 궁금해졌다. 귀를 쫑긋 세웠지만, 전혀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의자들을 높이 쌓아 올라가 들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할머니의 귀는 점점 커지게 되었다.
어느 날 시장에 간 할머니에게 한 아이가 물었다. “할머니 귀가 왜 그렇게 커요?” 집에 가서 거울을 보니 정말 귀가 커져있었다.
“이제 더 잘 들리겠지?” “내일은 더 잘 들릴 거야!” 하지만 들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귀만 더 크고 길게 자라났다.
의사선생님이 방문 진료를 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려고 너무 애쓰다가 병이 나셨군요. 못 들어서 생기는 병이 나신 거예요!”라고 했다.
의사선생님이 물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들으려고 애쓰셨나요?” 할머니가 대답했다. “위층 소리요!”
의사선생님의 처방에 의해 위층아이들은 아래층 할머니를 도와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모처럼 마음껏 뛰어 놀았다.
깔깔깔 웃고, 팔짝팔짝 뛰고,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도 추었다. 할머니는 이제 아주 잘 들을 수 있게 되고 귀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용기를 내어 집 밖으로 나가보았다. 복도에서 위층 아이들을 만났다. “아래층 할머니, 안녕하세요!” “얘들아, 안녕?”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개의 나가 있다. 나만큼 작은 마음(자아ego)과 우주만큼 큰마음(자기self).
자아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려 한다. 유교에서는 인심(人心)이라고 한다. 사람이기에 갖게 된 마음이다. 다른 동물들은 자아가 없다.
우주만큼 큰마음은 도심(道心)이다. 도를 닦아야 계발이 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우리 안에 희미하게 작게 있지만, 인간을 신처럼 위대하게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의 마음이 충족되어도, 알 수 없는 깊은 허무감을 느낀다.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도심을 길러야 한다.
인간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거울뉴런’이 생겨났다. 서로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의 마음이 우리 안에 생겨난 것이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울면 따라서 운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아이들이 하나로 느껴지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이 도심이다.
그러다 어른이 되어가며 아이들은 공감의 마음을 점점 잃어간다. 황금만능 사회에 살면서 도심을 잃어가는 것이다.
층간소음문제의 해결이 시급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대비해야 한다. 그림책 속의 할머니처럼 못 들어서 생기는 병에 걸리지 않도록.
그 병은 층간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보다 훨씬 심각할 것이다. 그림책처럼 낭만적으로 해결하기 힘들 것이다.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누군가를
찾아 나서고 싶다
- 황인숙, <비> 부분
우리도 시인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종종걸음으로/ 누군가를/ 찾아 나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