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인
사랑은 모든 감정 중 가장 이기적이다. 따라서 사랑은 배반당할 때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두 노인’은 인간의 ‘진정한 선행, 사랑’을 보여준다.
에핌과 엘리사는 오래 전에 맹세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에핌은 그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고, 한 가지 일이 끝나면 곧바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엘리사가 말했다. “우린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끝낼 수가 없다네... 영혼보다 더 소중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드디어 두 노인은 떠나기로 했다. 에핌은 가족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을 일일이 지시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필요에 의해서 알게 될 거야.”
두 노인은 모든 채비를 마치고는 순례의 길을 떠났다. 엘리사가 에핌에게 말했다. “난 물을 마셔야겠어. 먼저 가게. 저기 보아는 오두막집에 들렀다 가지.”
엘리사가 오두막집 마당에 들어섰다. 흙더미 옆에 몹시 야윈 한 젊은 남자가 누워있었다.
방에는 화덕 뒤 맨바닥에 한 여자가 길게 누워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노파가 낯선 노인을 쳐다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노파의 소매를 꽈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빵, 할머니, 빵.” 어린 소녀가 화덕 뒤에서 나왔다.
엘리사는 그들을 두고서 떠날 수가 없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마을에 가서 우유와 밀가루, 기름을 사왔다.
엘리사는 그들을 위해 암소를 사 주고, 남자가 곡식을 나를 수 있도록 수레도 사주었다.
엘리사는 빈털터리가 되어 집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기독교에서는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감정 중 가장 이기적(니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면이 허약한 사람의 ‘이타적인 사랑’은 자신의 공허감을 채우거나 약한 상대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거짓 사랑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엘리사의 사랑은 진정한 이타적인 사랑이었을까? 엘리사의 내면은 ‘믿음’으로 충만했을까?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핌은 그리스도의 성묘 옆에서 엘리사가 ‘사제처럼 두 팔을 제단에 올려놓고 머리를 환히 빛내면서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엘리사가 선행을 하던 그 시간에 엘리사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성묘 옆에 있었던 것이다. 환히 빛나는 모습으로.
석가도 깨달음을 얻은 후 깨달음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 얼굴을 보아라! 이전과 다르지 않느냐?”
환히 빛나는 얼굴은 깨달음, 믿음의 증거다. ‘신성(神性)’이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거짓 선행을 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은 환하지 않다.
간교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가득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거짓 선행에 속아 넘어간다.
집으로 돌아간 에핌은 엘리사를 만났다. 에핌이 엘리사에게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오두막집에 대해 얘기하려 하자 엘리사가 말했다.
“여보게, 그건 신의 일이야. 신이 하시는 일이지.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자네에게 꿀을 떠 주지.”
인간의 마음에는 ‘인간의 마음인 자아(Ego)가 있고, 신의 마음인 자기(Self)’가 있다.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 자기는 신의 마음이기에 자신(자아)도 모르게 선행을 한다.
자아가 하는 선행, 사랑은 이기적이다. 그래서 ‘배반당할 때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니체).’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방법을 꼽아 볼게요.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만큼, 넓이만큼, 그 높이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어떻게당신을사랑하느냐구요?> 부분
사랑의 기준은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만큼, 넓이만큼, 그 높이만큼’이다.
이 기준에 미달하는 사랑은 반드시 폭력이 된다. 사랑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모든 폭력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