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
눈을 사용하라!내일은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가지고 매일 살아간다면 평소에는 당연시했거나 보지 못했던 세상의 경이로움을 새삼발견하게 될 것이다. - 헬렌 켈러
견(見)과 관(觀), 둘 다 본다는 뜻이다. 견은 그냥 보는 것이고, 관은 어떤 대상을 정신을 집중해서 보는 것이다.
그냥 볼 때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만 보인다. 바깥의 풍경은 내 안의 풍경이다. 하지만 마음을 모아 집중해서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세상사를 관(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시인은 오를 때는 안 보이던 것이 내려올 때는 보인다고 노래했다.
올라 갈 때는 마음이 들떠서 자신의 생각 속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추락하게 되면, 두루 살펴보게 된다.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건강할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아플 때는 잘 보이게 된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그의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말테의 눈을 통해 파리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파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전혀 보지 못한 것들일 것이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사람들은 이 도시에 살려고 오지만, 내가 보기엔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모두 죽어 가는 것 같다.’
누가 더 파리를 잘 볼까? 그동안 파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일까? 어느 날 흘연히 나타난 말테일까?
우리는 익숙한 것에 편해진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 끝 부분에서 ‘익숙한 것의 폭력’을 잘 보여준다.
성서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새롭게 전개한다. 탕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가족이 싫어 낯선 도시로 떠난다.
그는 가족들의 사랑의 눈빛이 싫었던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보였던 ‘가족들의 사랑’을 전혀 다르게 보는 소설이 카프카의 ‘변신’이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 가족들은 그가 더 이상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변신하기 시작한다.
벌레로 변신했지만 불행하지 않았던 젊은 남자는 죽어가야 했다.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칭송해마지 않는 가족의 사랑이다. 우리 가족은 그런 가족이 아니라고?
‘3년 병치레에 효자 없다’는 속담이 왜 생겨났겠는가? 파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병실의 침대에 누워있으니까. 그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니까. 아니 아무도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니까.
파리의 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파리는 살맛나는 도시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던 탕자는 ‘진정한 사랑’을 보게 된다. 신의 사랑, 영원히 샘솟듯 솟아나는 사랑의 샘물을.
그는 아직 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고향으로 돌아간다. 언젠가는 그의 깊은 내면에서 신의 사랑이 솟아날 것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높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눈으로 자신의 마음과 세상사를 보아야 한다.
인간은 직립하게 되면서 눈이 가장 중요해졌다. 그전까지는 아마 후각, 청각이 중요했을 것이다.
직립인간의 앞발은 손이 되었다. 손과 눈이 협력하며 만들어낸 눈부신 우리의 문명,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면 손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문명사회는 늘 아슬아슬하다. 언제 우리의 손이 문명사회를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뜨릴지 모른다.
마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가슴은 하나뿐
하지만 한 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사랑이 끝날 때에는
- 프란시스 윌리엄 버딜론, <사랑이 끝날 때> 부분
한 곳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눈을 맑다고 한다. 내면의 영혼이 깨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자신과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아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