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그 많은 순간들과 날짜들로 혼합되어 있더라도, 그 많은 순간들과 그 많은 날들은 단 한 순간, 즉 인간이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아는 순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한 사람에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의 시간이,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약속 장소로 가던 사람이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음...... .’ 그는 ‘ㅁ 가상현실 가게’에 들어갔다.
그는 단돈 1만원을 내고 기괴하게 생긴 모자를 쓰자, 자신이 원하는 삶이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가상현실 세계로 들어갔다.
그는 조선시대의 왕이 되어 왕 노릇을 수십 년 하고는 물러났다. 현실로 돌아왔다. 시간이 5분밖에 지나가지 않았다.
앞으로 2,30년만 지나면 일상이 될 미래의 모습이라고 한다. 가상현실의 기술이 발전하여 우리는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볼 수 있다’고 한다.
옛날 옛날에 한 중년 남자가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갔다. 나무를 잔뜩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신기한 동굴이 보였다.
그가 조심스레 들어가 보니 신선 같은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잠시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한 노인을 붙잡고 자신은 이 집에 사는 아무개라고 말했더니 그 노인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저의 증조할아버지를 어떻게 아십니까?” 잠시 바둑을 구경하는 사이에 백여 년이 흐른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우주선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몇 시간 후에 돌아왔는데, 우주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시간은 이런 것이다. 절대적인 시간은 없다. 위치에 따라 시간은 다 다르게 흐르는 것이다.
본인은 ‘잠깐’으로 느껴지는 시간이 다른 곳에서 보면 수십 년이 흐를 수 있는 것이다.
조만간 우리는 가상현실의 기술을 통해 옛 이야기로 전해지거나 영화에서 상상하던 것들을 실제로 살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피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마약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삶을 내팽개치고 가상현실기술이 주는 환각의 나라만 찾게 될 것이다.
원시인들도 마약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피폐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과 가상,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빙 둘러 앉아 함께 마약 성분의 풀을 씹으며 황홀경에 들어갔다. 그들은 하늘의 별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현실로 돌아온 그들은 현실의 삶에 충실했다. 왜? 삶은 원래 현실과 꿈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니까.
그들은 꿈을 꾸면 함께 꿈의 지혜를 나누었다. 삼라만상에는 다 신이 깃들어 있었다. 일상이 가상현실의 삶이었다.
장자처럼 꿈에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다 깨어나서는 ‘지금은 혹시 나비가 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현실의 삶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보르헤스는 말했다.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한 사람에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의 시간이,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이다. ‘현재’라는 찰나를 우리가 온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순간, 찰나에 모든 게 담겨 있다. 찰나가 곧 영원이다.
풀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 풀로 자라나듯, 나 하나는 우주로 활짝 피어난다. 우주는 나 하나로 축소된다.
천지자연의 실상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유의 구조는 어떤가? 과학이라는 이성적 사유에 갇혀 천지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이런 삭막한 감성으로는 가상현실시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우리의 사유가 이성중심의 근대를 넘어서야 가상현실시대의 도래는 축복이 될 것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강이다. 시간은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호랑이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호랑이다. 또한 시간은 나를 태워버리는 불이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불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화해> 부분
우리는 우리를 갈가리 찢어놓는 것들과 ‘화해’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깔끔이 씻어내는 시간의 강물과, 느닷없이 나타나는 질병과 죽음과, 호시탐탐 노리는 탐욕의 눈빛들과.
마냥 즐거운 아이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