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라가는 것을 도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 자사,『중용-1장』에서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 중의 하나.
신혼 초 성남에서 살 때였다. 어머니께서 막 태어난 큰 아이를 돌보려 우리 집에 와 계셨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답답하셨는지 뒷산 약수터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천천히 약수터 가는 길을 걸어갔다.
어머니는 건강이 안 좋으셨다. 주저앉으시며 숨 차 하셨다. 나는 곁에서 어머니가 일어나시길 기다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시며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나와 어머니는 묵묵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광경과 어머니의 얼굴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어머니를 업고서 약수터에 다녀오면 됐을 것을. 시골에서만 사셨던 어머니가 그렇게도 답답해 하셨는데도 그냥 집으로 왔어야 했는가!
왜 나는 적당히 마음 아파하며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까?
‘나’라는 생각에 갇혀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학교 교사라 약수터에서 학생들이라도 마주치면 창피하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오랫동안 세상의 눈치만 보며 살아오다 보니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내 안에서 ‘어머니를 업고서 다녀 와!’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을 텐데.
‘나(자아)’는 진정한 나, ‘참나’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쓰는 ‘가면(페르소나)’일 뿐이다. 세상살이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게 자아다. 교사는 교사 역할을. 부모는 부모 역할을. 남자는 남자 역할을. 남편은 남편 역할을...... .
그래서 세계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극만 하다가면, 우리의 진정한 삶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진짜 나, ‘참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참나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있다. 동양의 경서 ‘중용’에서 말하는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는 그 성에 있다. 그 성을 따라가는 것이 도(道)이고, 도를 닦는 것이 교(敎)다.
우리의 성(본성)에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道)인 것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따라야(배워야) 한다.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참 나’는 이 ‘우주의 근원(신神, 하늘天 도道)’에 닿아있다. 본성의 명령을 들으며, 참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면 우리는 우주의 근원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신인합일(神人合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최고의 인생이란 후회 없는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그리하여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의 하나님, 이제 당신에게로 가서 끝없이 빛으로 새어나오는 동굴이 되렵니다 물밀 듯이 밀려가는 기쁨의 통로 저편, 나의 하나님, 봄부터 여름까지 막혀있던 당신의 실핏줄 하나 이제 열립니까
- 이성복,《낮은 노래2》부분
‘나(자아)’는 막힌 동굴 같은 것이다. ‘나’라는 생각 속에 갇혀 어두컴컴할 뿐이다.
하지만 ‘참나’가 깨어나면 내 마음이 우주의 근원에 닿아 동굴 안이 환하게 밝아진다.
‘참나’의 삶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