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오아시스

by 고석근

사막의 오아시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사막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그의 저서 ‘블리스로 가는 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슬로가 말하는 다섯 단계의 욕구는 사실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없을 때 이차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는 생존의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관계에 대한 욕구, 명예욕, 자기계발 욕구에 이르는 다섯 가지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는 이론이다.


나도 끈질기게 이 단계들을 밟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염두에 둔 생존의 욕구, 잊어버린 적이 없다.


이 생존의 욕구는 ‘월급쟁이’로 구체화되었다. 매달 고정적인 월급을 받는다는 건, 환상적이지 않는가?


일생 동안 저녁이 있는 삶이 있고, 휴일을 즐기고, 해외여행 정도 갈 수 있는 여유. 크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연금을 받아 노후가 보장되는 삶.


나는 그런 정규직을 두 번이나 박차고 나왔다. 인간에게 있는 또 다른 욕구 ‘자기초월의 욕구’를 저버리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기성회비를 못내, 귀가 조치를 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언제까지 기성회비를 낼 수 있는지 부모님께 여쭤보라고 집으로 보냈다.


뙤약볕 아래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두고 봐라. 나는 유명한 과학자가 될 거야!’


그때 나는 초월의 욕구를 꿈꾼 게 아니었을까? 과학자가 되어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뭔가 고귀한 것, 나는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야! 지금 비록 학교에서 쫓겨난 신세이지만, 두고 봐라!


하지만 나는 생존의 욕구와 자기 초월의 욕구가 사실상 하나로 붙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30대 중반, 자유인이 되어 세상을 떠돌 때 그 복음을 처음 들었다. 그 두 욕구가 하나라고 했다.


시를 공부하러 갔을 때, ㅇ 문학평론가가 말했다. “10년을 시를 써 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거야.”


나는 깊은 내면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걸어가는 길에는 항상 행운이 따른다는 것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천지자연은 하나의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길에는 원망이 따라온다(공자).’


나는 오랫동안 나의 두 욕구가 하나로 합쳐지는 길을 찾아 헤맸다. 10년을 버틸 수 있는 일, 지치지 않고 10년을 갈 수 있는 길.


천지자연의 도(道)는 지치지 않는다. 사람도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춰 살아가면 지치지 않는다.


그 이치에 따르는 삶에는 자연스레 생존이 따라올 것이다. 나는 오랜 방황 끝에 그 길을 인문학 강의와 글쓰기에서 찾았다.


인문학을 강의할 때와 글을 쓸 때는 지치지 않는다. 강의와 글쓰기가 끝났을 때, 한동안 세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꽃으로 장엄한 세상, 화엄(華嚴)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세상은 차츰 시들어진다. 세상은 사막이 된다. 목이 마르다. 버석거리는 길을 걷는다.


강의실에 도착하면 한순간에 세상은 오아시스다. 부족함이 없는, 충만이 온몸 가득 차오른다. 언젠가는 이 세상 전체가 오아시스가 될 것이다.


인간이 사막에서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자기계발서는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 잘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다.


인문학은 오아시스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다. 오아시스에는 육체와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가시게 하는 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낙타를 끌고 가도 막막해

낙타를 타고 가도 막막해

해를 봐도 막막해

사방을 둘러봐도 막막해

막막해


- 최승호, <사막> 부분



사람들은 인생은 고(苦)라고 하면서 사막에서 버티려고 한다.


석가가 인생은 고라고 한 건, ‘인생은 원래 고통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고(苦)의 뜻은 만족하지 못하는 고통을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사막)에서는 무엇을 해도 만족할 수 없으니, 영원한 생명의 샘, 오아시스를 찾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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