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다. 기쁨이 있는 곳에, 사람과 사람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또한 기쁨이 있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오래 전 시골에 살 때였다. 한 도예가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 풍물 치는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어우러졌다. 노래판이 벌어지고, 밤이 이슥하도록 우리의 술판은 끝날 줄을 몰랐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자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야 깨어났다. 이웃집 아저씨가 찾아왔다.
‘헉! 얼마나 시끄러웠을까? 화가 나서 찾아왔나보다!’ 다들 긴장했다. 그 아저씨는 우리에게 말했다.
“어젯밤 하도 시끄러워 왔었어요. 그런데 너무나 신나게 노는 모습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이나 구경하다 갔어요.”
참으로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이웃집의 ‘소음’이 좋은 구경거리였다니! 가끔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전해들을 때가 있다.
작가, 예술가들의 술판이었다. 소음과 음악은 한껏 차이일 것이다. ‘누구한테서 나오는 소리인가?’
나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 마을 잔치를 많이 보았다. 술에 얼근하게 취한 얼굴들이 보기 좋았다.
어머니께서도 장구를 치며 춤을 추셨다. 아프지 않은 엄마, 힘겨운 노동에서 해방된 엄마의 모습.
이제 시골에도 이런 잔치판들이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사람은 혼자이면서 동시에 ‘여럿이 함께’의 존재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 살아가는 현대인들. 소음을 피해 진공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한가? ‘프라이버시’라는 게 진정 있는 걸까?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들, 우리나라의 묻지마 범행들은 왜 일어나는 걸까?
그들은 프라이버시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껍질을 벗고 거리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같이 죽자(살자)!”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절망에 빠진 인간은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죽음이야말로 한달음에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 “왜 혼자 죽지... 같이 죽자고 해?”
이런 질문은 아직 덜 외로워서 하는 것이다. 산길을 가다 노인들의 눈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러다 말은 걸 때가 있다. 그러면 그들은 한참동안이나 자신들 얘기를 쏟아낸다. “나도 한때 왕년에...... .”
젊은이들은 푸념을 한다. “지하철을 타면 노인들이 쳐다봐요. 어찌나 아래위를 훑어보는지 민망해요.”
노인들은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것이다. 그들 안에는 ‘어른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기’가 있는 것이다.
개인으로 잘 살아가는 듯이 보이는 젊은이들은 노인이 되면 어떻게 될까?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오래 전에 월드컵에서 우리는 한순간에 하나가 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하지만 이런 ‘하나 되기’는 위험하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탄생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 되기는 아래에서 올라와야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일하는 직장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 모임들이 모여 건전한 시민사회를 이뤄가야 한다. ‘홀로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야말로, 인간의 향과 빛을 내뿜는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프라이버시를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늘 비상상황에 처하게 된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 함민복, <섬> 부분
시인은 섬을 보며, 섬처럼 서로 떨어져 살아가는 인간세상을 본다. 물 울타리를 사방에 쳐놓고 각자 자신들 속으로 웅크려 들어가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그는 생각한다. 물 울타리는 가장 낮은 게 아닌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