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언영색(巧言令色)

by 고석근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이야말로 군자다. - 공자



어릴 적 아버지는 내가 친구들과 방에서 이불을 갖고 희희덕거리며 장난을 칠 때,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소리치셨다. “이 초래이(초랭이) 같은 놈아!”


커서 알았다. 초랭이가 무엇을 말하는 지를. 하회별신굿 탈놀이에 하인 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인데, 춤동작이나 말투가 촐랑거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촐랑거리는 짓, 나는 왜 촐랑거리는 짓을 잘했을까? 아니 왜?


일본의 뛰어난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을 읽으며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좋으니 웃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내가 그들의 소위 ‘삶’ 바깥에 있더라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까.”


‘아, 이거였구나! 나의 처세법이었구나!’


‘막연히 그렇게 생각한 것도 같은데, 다자이 오사무가 콕 찍어 말해주는 구나!’


그렇다. 나의 세상 살아가는 법이었다. 세상은 항상 나와 버석거렸다. 그 마찰이 너무나 싫고 버거웠다.


‘어떡하라고?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하라고?’


광대 짓을 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짓궂게 장난을 치거나, 헤헤거렸다. 나는 속으로 나의 바보짓을 알았다.


하지만 껄끄러운 이 분위기만 타개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예감했다. 이런 인간들과는 앞으로 상종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언젠가는 광대 짓을 하며 견딘 인간관계들을 다 끊으리라.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끊어냈다. 혼자 남았다. 거리를 두고 지낸 사람들과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관계를 이어갔다.


내가 그들과 견딘 얼굴 표정은 교언영색, 남에게 잘 보이려고 그럴듯하게 꾸며 대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였다.

나는 사람들과 대충 지내지 못한다. 아예 처음부터 멀찍이 거리를 두고 지내는 관계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친하다고 생각했거나 어떤 뜻으로 만난 사람이 기대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면 사정없이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들에게는 교언영색으로 대하는 게 싫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꾸미지 않은 얼굴로 만나는 사람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공자는 교언영색을 소인의 특징으로 보았다. 소인이 너무나 되기 싫은 소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견디는 가면인 경우가 엄청나게 많지 않을까?


나의 처세술, 교언영색은 나의 타고난 장난기일까? 상종하기 싫은 인간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할 때 쓰는 가면이었을까?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인간 실격을 견디고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에게서 자신의 영혼을 구제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교언영색으로 견딘다. 아니,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예쁘냐고 비결을 진지하게 묻는다.


그러면 상대방도 함께 연기를 한다. 한참동안 미녀의 비결을 들려준다. 상대방은 건성으로 들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우리는 모두 소인 연기를 하다 소인이 되어버린 걸까? 나는 글을 쓸 때, 혼자 있을 때, 강의할 때가 좋다.


교언영색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오롯이 나로 있는 시간이다. 꿈 속 같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면 빛의 속도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교언영색의 시간, 소인의 시간이다. 아, 대인이 되지 못한 내가 한평생 감내해야하는 시간인가?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

소나 돼지나 염소나 닭

모두 시시해요.

그러나, 다람쥐는

볼수록 신기해요.

어디서 죽는 줄 모르는

하늘의 새

바라볼수록 신기해요.

길러지는 것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볼품없어요.


- 임길택, <나 혼자 자라겠어요> 부분



나는 왜 시인처럼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마 시인도 탄광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서 배운 게 아니었을까?


내 안의 아이가 언제나 소리친다. ‘나 혼자 자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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