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독존(唯我獨尊)

by 고석근

유아독존(唯我獨尊)


생각하지 말고, 보라!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아주 오래 전에 절에서 보름 동안 지낸 적이 있다. 사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세상은 너무나 부조리하게 돌아가는데, 나는 너무나 무력했다.


밥만 먹으면 온 산을 헤매었다. 그러다 지치면 절로 돌아왔다. 가끔 법당에 들어가 좌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갑자기 온 세상이 환해졌다. 마음은 더 없이 평온했다. 절에 온지 13일 째 날이었다.


절에서 나와 고향집으로 걸어갔다. 3시간 동안 걸었다.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춥지도 않았다.


혼자 크게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지금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그날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큰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며, 내 마음이 말갛게 씻어진 것 같다. 그로부터 5년 후 깊은 밤 한강 고수부지에서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


문학 공부를 함께 하던 벗들과 술에 취해 흥청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강물을 보고 싶었다.


허적허적 강물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였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고, 저기에는 강물이 흐르고, 나는 여기에 있구나!”


삼라만상 다 웃는 듯했다. 마음이 너무나 평온했다. 한참 동안 강물을 보다가 벗들에게 돌아와 함께 어울렸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우리는 태어나 상상계, 어머니와 하나인 세계에 살다가 아버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아버지의 세계는 상징계다. 어떤 상징체계들로 굳건하게 세워진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이 두 세계는 실재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상상 속, 남이 만든 상징 속에서, 즉 허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라캉은 우리가 실재계를 알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생각으로 아는 것이고 생각은 곧 언어이니까.


그 세계는 우리의 사고,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나는 그 뒤 인문학을 공부하며 나의 길을 찾아갔다. 바로 내가 본 실재계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면 깊은 희열을 느낀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말하는 ‘블리스’다.


내가 진정한 행복을 느낄 때는 실재계의 언저리에 갔을 때다. 그 세계에서는 나와 너의 구별이 없다.


우주와 내가 하나다. 내가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다. 은은한 기쁨이 있을 뿐이다. 관음보살의 ‘천년의 미소’다.


나는 누구인가? 석가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소리쳤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아마 기독교의 유일신도 크게 보면 이와 같지 않을까? 위대한 예언가들은 온 세상이 다 하느님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았을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세계의 눈으로 보면 ‘유아독존’은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큰 사랑이 되는데, 머리로만 생각하면, 유아독존은 자신만 존귀하다는 망상이 된다.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만 옳고 남의 종교, 사상은 악의 축으로 배척하는 것은 머리로만 유아독존, 유일신을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宗敎)는 글자 그대로 최고(宗)의 가르침(敎)이다. 영어로는 religion이다. 어원은 라틴어의 ‘religio’로 ‘재결합’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자아가 있어, 자신이 홀로 존재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종교는 이 오만한 자아를 다시 우주와 결합하게 해 진짜 자신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것을 명확히 깨닫게 되면,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잘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악의 근원은 ‘자아의 오만’이니까.



사유보다 더 음란한 것은 없다.

이런 희롱은 바람에 날려온 잡초처럼

데이지를 위해 마련된 화단에서 번식한다.


사유하는 자들을 위한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방종한 해석과 저속한 야합

오만하게 이름지어진 것들,

드러난 것에 대한 원시적이고 방탕한 추구,

말 많은 주제들에 대한 음탕한 촉진.

관점의 산란 - 그들에겐 바로 오락.


〔......〕


밀회 중엔 겨우 홍차만이 교접한다.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입술만 움직인다.

각자 다리를 꼬고 앉는다.

한쪽 발은 땅에 대고

다른 한 발은 공중에서 흔들면서.

가끔 누군가 일어서서,

창으로 다가가고,

커튼 틈으로

거리를 훔쳐본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포르노 문제에 대한 발언> 부분



시인은 슬프게 노래한다.


‘사유보다 더 음란한 것은 없다.’ ‘사유하는 자들을 위한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유하는 사람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 풋풋하게 약동하는 이 세상을 느낄 수가 없다.


그는 궁금하다. 세상의 실상이! 그래서 그의 눈은 음란하게 되고 항상 포르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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