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관지(一以貫之)
고통을 체험한 영혼은 잠자는 영혼보다 훨씬, 말 할 수 없을 만큼 강도 높은, 빛나는 변형을 이룬다. 성숙은 그런 대가에서 자라는 것과 같다. - 칼 야스퍼스
나는 51세 때 크게 아프고 나서 그때까지의 공부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공자가 말한 ‘일이관지’가 나의 뇌리에서 번갯불처럼 번득였다.
공자와 그의 제자 증자에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 도(道)는 하나의 원리로 회통하는 것이다.”
동료 제자들이 증자에게 그 회통하는 원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증자가 대답했다. “충서(忠恕)일 따름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충(忠)은 마음(心)의 중심(中)을 말하는구나! 서(恕)는 다른 사람과 같은(如) 마음(心)과 되는 것이고.’
증자가 말한 충서가 가슴에 선명하게 와 닿았다. 천지자연의 도는 인간 세상에서 충서로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 충은 모든 성현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내면의 로고스의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석가는 자신 안의 불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표현은 다 다르지만, 크게 보면 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이미 도와 하나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중심을 잡으면, 우리 마음은 도와 하나가 된다. 그때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래서 공자는 말했다. “나이 70이 되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해도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천지자연의 원리와 하나인 마음의 중심을 항상 잃지 않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마음과도 같아진다.
공감능력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달라진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같은 반응을 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도 모르게 된다.
우리는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생각이 깃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건강한 신체에는 건전한 생각밖에 깃들지 않는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는 크게 아프고 나서, ‘고통을 체험한 영혼은 잠자는 영혼보다 훨씬, 말 할 수 없을 만큼 강도 높은, 빛나는 변형을 이룬다.’는 야스퍼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죽을 고비에 가자,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일상이었다. 그야말로 잠자는 것과 같았다.
육체가 완전히 쇠하자, 영혼이 깨어났던 것이다. 건강한 육체에서는 건전한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영혼이 깨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는 한 육체에 집착하게 되어 있다. 육체가 사실은 에너지, 기(氣)라는 것을 잊게 된다.
그러다 육체가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되면, 영혼이 말갛게 깨어난다. 나와 천지자연이 하나임을 훤히 알게 된다.
마음은 완전히 중심을 잡은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도 완전히 하나가 된다.
육체에 집착하는 한, 나와 다른 사람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생각으로는 다른 사람의 희로애락을 이해하겠지만, 몸으로 공감하기는 힘들다.
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면서, 나의 육체에 집착하게 된다. 산에서 고요히 걷거나, 요가를 하며 명상을 할 때는, 충서가 되는 듯하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내 마음은 중심을 잃어가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닌 내 마음을 챙기기에 바빠진다.
하지만 죽을 고비에서 명확하게 보았던 그 눈부신 순간들을 항상 되새기게 된다. 그 시간들이 실제의 나의 삶이라는 것을 아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 에밀리 디킨슨, <만약 내가> 부분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고(苦)로부터 해방된다.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