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인간

by 고석근

성실한 인간


이 땅을 걷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 임제


나는 학교 다닐 때 왜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즐겁게 그림을 그리다 종이 치면 즉각 중지하고 쉬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몰입하는 힘이 약해져 버린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과목을 공부하다가 무조건 10분 동안 쉬고 갑자기 싫어하는 과목을 억지로 해야 하는지.

이렇게 학창 시절을 수십 년 보내고 나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기꺼이 다 할 수 있는 ‘성실한 인간’이 될 것이다. 이런 인간형은 산업사회에 맞는 인간이다. 우리 사회가 산업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여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 사회는 산업사회를 넘어서 탈산업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수업 시간을 통합하고 쉬는 시간을 늘리는 학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 ‘근면 성실한 인간’이 아니라 ‘몰입하는 인간, 창조적인 인간’을 원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잘 노는 인간’이 성공하게 될 것이다. 놀이와 일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가능해지고 있다. 열심히 노는 것이 일이 되는 사회. 얼마나 멋진 사회인가!

그러려면 이제 공부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공부와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 왕양명은 삶 속에서 공부하는 ‘사상마련(事上磨鍊)’을 주장했다. 석가가 도를 깨치기 위해 수련한 위빠샤나 명상법도 삶과 수련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를 깨친 석가의 일상은 그 자체가 도의 세계였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발을 씻는 행위나 식사를 하는 시간이나 설법을 하는 시간이나 다 똑 같이 중요시했다. 어느 시간이 우위에 있지 않았다. 항상 그는 ‘화엄(華嚴)의 세계’에 살았던 것이다.

공부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나눠지면 이 세계는 광휘로 가득찬 시간과 거무칙칙한 시간들로 나눠져버린다.

일상이 공부가 되면 일상이 차츰 빛이 나고 향기가 나게 된다. 우리가 ‘일상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현재에 머물 수 있다.

우리가 불행한 건 현재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는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아이들이 행복한 건 오롯이 현재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부와 삶이 일치가 되면 우리는 이 아이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언제 봐도 바람은 즐겁다. 만나는 것들을 간질이며 장난을 치고 있다. 우리는 이 바람처럼 장난을 치지 못한다. 일상을 즐기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보다 걷는 것이 기적이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새는 나는 것이 일상이면서 기적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걷는 것이 기적이 되지 못하나?

우리의 일상이 누추하게 된 것은 공부와 일상이 분리되어 우리가 일상에 대한 경외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제 일상의 삶을 공부와 일치시키자. 숨을 쉬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책을 읽는 것. 그 모든 시간이 공부가 될 때 우리는 지상낙원, 영원한 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박재삼,《천년의 바람》부분



배우는 게 즐거워 나이 드는 것조차 잊었다던 공자는 그가 살았던 춘추전국 시대가 공부방이었다.

우리도 이 시대, 이 땅을 공부방으로 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천년의 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비로소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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