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 - 나가르주나
우리는 인과응보를 당연시한다.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는 거 아냐? 언뜻 생각해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인 듯하다.
하지만 이것도 ‘한 생각’이다. 이 한 생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의 생각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는 없으니까.
우리의 인과응보라는 상식을 일단 내려놓고 잘 생각해 보자.
저 들판에 있는 풀 한포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풀의 씨앗일까? 맞다. 씨앗이 있어, 싹을 틔우고 자란다.
하지만, 지금의 풀이 씨앗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씨앗 안에는 지금의 풀이 이미 예견되어 있었을 테니까.
지금의 풀이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면, 풀의 씨앗이 어떻게 지금의 풀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럼 지금의 풀 곁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내리 쬐는 햇살, 가만히 앉아 있는 바위, 흙 아래에서 흐르고 있는 물은 풀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들도 지금의 풀이 되게 한 원인들이 아니었는가? 물이 알맞게 흐르지 않았다면, 지금의 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직선의 시간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과응보는 시간이 직선으로 흐를 때만이 유효하다. 우리는 경험상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우주 차원으로 커지게 되면 다른 시간의 경험을 하게 된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공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지구에 있을 때와 화성이나 금성에 있을 때는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이 좀 더 예민해진다면, 우리는 가는 곳마다 다르게 흐르는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현대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세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만, 원자 보다 더 작은 미립자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시간은 그야말로 우리의 둔감한 감각의 경험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 물질 또한 감각적 지각에 불과하다. 물질은 파동이 낮은 에너지가 우리의 감각에 물질로 지각될 뿐이다.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에게는 이 세상은 에너지의 파동으로 지각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과응보란,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물질의 세계에서 어떤 특정한 면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물질은 탄생과 소멸을 겪게 되니 시간은 당연히 직선으로 흐르고 원인과 결과가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인 육체로 보면, 인과응보가 진리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을 육체 이상으로 확장시켜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몸에 붙어 있는 의식을 다 떼어놓고 무심히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에너지의 파동이다.
이것을 인도에서는 시바의 춤이라고 한다. 인도의 명상가들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이 세상의 물질은 헛것이고, 실제는 에너지의 파동이라는 것을.
우리도 명상을 해보면,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들은 어떤 측면에서만 옳은 것이다.
이것을 과학자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고 했다. 시대마다 다른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만나게 되면 원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몸의 차원에서는 일전 부분 맞을 것이다.
우리는 몸으로 살아가기에 인과의 응보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몸을 넘어서는 의식을 갖게 되면 인과응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인과응보의 법칙을 넘어서는 전혀 다른 인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제2의 부처로 불리는 나가르주나는 말했다.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는 생각에 갇혀있는 있는 한, 우리는 인과응보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한 생각을 넘어서게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나와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길흉이나 화복은
연유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니
깊이 그 원인을 살필 지언정
겁내지는 말지니라!
불길은 윤택한 집을
태우기는 하여도
풍랑은 속이 빈 배를
뒤집어엎지는 않느니라!
- 백거이, <감흥> 부분
우리는 운명(運命)을 사랑해야 한다. 명(命)은 타고났지만, 이 명을 우리는 잘 쓸(運) 수가 있다.
빈 배는 풍랑을 만나면 풍랑을 타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