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by 고석근

인간의 조건



TV 드라마 ‘그린 마더서 클럽’에는 한순간에 불법 음란물 영상 제작 유포자로 추락하는 한 유명 영화감독이 나온다.


그는 경찰서에서 형사들에게 큰 소리를 친다. “국위를 선양하는 영화감독인 내게 이래도 됩니까?”


그는 해외에서 받은 영화감독상을 내세운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형사들이 음란물 증거물을 갖고 다그치자 그는 말한다. “당신들이 예술을 이해해? 그게 다 예술가의 고뇌라고.”


그는 자신이 짜깁기하여 유포한 누드사진이 당사자(비록 죽었지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에 매몰되어 있을 것이다. 이전투구(泥田鬪狗), 우리는 지금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개가 되어 있다.


다들 쌍방과실이다. 그러니 서로 무죄다. 가해자고 피해자이고 피해자가 가해자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세상 아니야? 어떤 수를 쓰더라도 살아남아야 해. 약육강식(弱肉强食)이야!


우리 사회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다들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허무주의자가 찾는 건, 자극적인 쾌락이다. 몇 년 전에 N번방이 크게 이슈화되었었다.


N번방은 성을 매개로 한 사디스트들과 마조히스트들의 향연이다. 성은 사랑으로 남녀가 만나는 것인데, 거기

에는 성을 매개로 한 병적인 폭력이 있을 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극한의 쾌락을 찾아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가 된다. 이게 정치적으로는 파시즘, 전체주의로 나타난다.


그 영화감독은 사디스트다. 그가 만든 영화에 열광하는 우리는 사디스트거나 마조히스트다.


그런 반인륜적인 폭력이 예술의 이름으로 병자인 우리들을 위무한다. 그러니 그 영화감독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할 수 있을까?


그는 교도소에 갇혀서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진흙탕 속에서 서로 싸우다 함께 죽어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살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회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잘못 살았어! 다시 태어나면 잘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훤히 보일 것이다. 바로 성찰하는 삶이다. 항상 자신의 마음을 보살피는 삶이다.


현대사회는 대중사회다. 신이 죽은 세상에서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살아간다. 답이 없으니 서로를 닮으며 뭉쳐 있으려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다. 더 이상 진화하려 하지 않는 인간.

눈부신 물질문명이 늘 우리 인간에게 속삭인다.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사는 거야! 카르페 디엠이야!’


이런 삶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을 니체는 ‘초인’이라고 했다.


시류에 따라 함께 휩쓸려가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등불을 켜는 사람, 그 빛을 따라가는 사람.


그 길은 얼마나 고독할 것인가! 초인의 길을 걷던 니체는 끝내 정신병원에 갇혀 살아야 했다.


인간의 조건은 성찰인데, 성찰하는 삶은 이리도 힘들다. 처음으로 성찰을 인간의 조건으로 내세운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어야 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명예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