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해질 권리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존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우리 사회는 ‘멋진 신세계’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되도록이면 고통을 회피하게 하고, 사회는 고통을 회피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해준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 구호에 따라 현대문명 사회는 모든 것이 재배치되고 있다.
언젠가부터 다음과 같은 명제가 등장했다. ‘행복= 쾌락’ 최대다수 최대행복. 개인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도 최대다수의 최대쾌락이 정책 입안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에 반대하는 야만인 존, 그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한다. 왜 그럴까? 존은 명쾌한 반대 논리를 전개하지는 못한다.
존이 느끼는 것을 우리도 모두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은 분명히 줄어드는데, 행복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통과 행복은 반대 같지만, 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반대되는 것들은 사실 하나다.
이러한 천지자연의 이치를 노자는 ‘대극합일(對極合一)’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미움과 사랑은 반대되는 것 같지만 둘은 하나다.
선과 악도 그렇다. 겉으로는 반대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는 없다.
겉으로는 악으로 보이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 선을 이룩하는 힘이 있다. 우리 앞에 악한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신은 더 이상 고양되지 않는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은 우리 안의 ‘그림자’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우리 안의 어두운 마음의 투사다.
미워하는 사람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높이 올라간 사람은 항상 낮은 곳을 봐야 한다. 고위직에 올라간 사람이 낮은 곳을 보지 않으면 한순간에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가 높은 곳에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낮은 곳에 있었다. 그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그들이 그를 낮은 곳으로 떨어뜨린다.
깊은 밤에도 낮은 있다. 희끄무레한 낮이 밤의 끝에서 점점 밝아진다. 낮이 극에 이르면 다시 밤을 향해 나아간다.
먼 곳에서 물고기들을 데려올 때는 천적도 함께 넣어가지고 온다고 한다. 그래야 천적을 피해 도망 다니며 생명의 힘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이 올 때 온 몸으로 맞이해야 한다. 고통 앞에 마주서면 우리 안의 생명의 힘이 깨어난다.
고통이 올 때마다 고통을 이기는 힘도 함께 커지며, 우리는 고통의 크기만큼 큰 희열을 함께 맞보게 된다.
고통이 적으면 희열도 적다. 고통이 아예 없으면 희열도 아예 없다. 무료해진다. 생명의 힘이 고갈된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살아간다. 안에서 올라오는 희열이 없다.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 기계처럼 살아가는 삶, 좀비다. 좀비의 얼굴에는 시체 같은 굳은 얼굴 표정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길들여진 습관이 있어, 살아가는 것뿐이다. 우리는 힘들게 살아야 한다. 위험하게 살아야 한다.
죽음의 위험에 이르면 우리 안에서 영혼이 깨어난다. 찰나 속에서 영생을 경험하게 된다.
성현들은 자신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부쳤다. 신(神)으로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