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未生)을 위하여
고독한 자는 말한다. -사람은 고독에 따르기 마련인 많은 권태와 불쾌한 감정, 지루함의 대가로 자기 자신과 자연에 더 깊이 침잠하는 그 15분을 얻는다. 지루함에 대해서 완전히 보루를 쌓는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루를 쌓는 법이다.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제일 힘이 되는 생명의 물을 그는 결코 마시지 못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TV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가 툭 던진 말 한 마디가 위기에 빠진 영업 2팀을 구한다.
수출품을 가득 싣고 항해하던 배에 구멍이 난다. 이때 ‘먹물들’은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매뉴얼이나 전문가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고졸인 장그래는 “구멍이 나면 때우면 되지 않나?”하고 혼잣말을 한다. 무학(無學)의 통찰이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실 없는 말이라고 생각할 때, 과장은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하고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게 된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창의적인 생각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편적인 지식위주의 교육이 낳은 병폐다.
장그래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공부하며 깊은 좌절을 겪었다. 가난은 사람을 궁(窮)하게 하지만, 동시에 통(通)하게 한다. 궁즉통(窮則通)이다.
나는 오랫동안 성인 대상의 인문학을 강의하며, 번득이는 지혜들이 학력이 낮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설날 집에 온 작은 아이는 미생을 세 번이나 보았다고 했다. ‘아, 회사 다니는 작은 아이에게 미생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코로나 19가 잠잠해지면 작은 아이와 한 달에 한 번씩 술을 마시며 인문학을 함께 공부하기로 했는데, 공부 자료로 미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생(未生), 아직 덜 된 생(生)이다. 바둑에서 돌이 아직 완전히 살아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자기들을 ‘완생(完生- 바둑에서 쓰이는 용어로, 외부를 향한 활로가 막혀도 죽지 않는 상태의 돌을 말한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세상의 실상은 미생이다. 항상 생성변화 한다. 시작도 없고 완성도 없는 끝없는 변화가 천지자연의 실상이다.
지식이 적을수록 이러한 이치를 잘 알 수 있다. 생명체의 본능이다. 하지만 지식위주의 공부를 많이 하다 보면, 사고가 굳어진다.
지식공부는 언어를 많이 익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언어로 만들어진 강고한 틀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 틀에 잡히지 않는 사건 앞에서는 그는 무기력한 아이가 되고 만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틀이 약하기에 ‘감(感)’으로 세상을 본다.
따라서 큰 지혜는 무지에서 나온다. 일본의 선사 이큐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수행승이 길을 막으며 물었다. “불법은 어디에 있는가?”
이큐 선사가 담담히 말했다. “가슴 속에 있다.” 이에 수행승은 단도를 뽑아 선사의 가슴에 들이대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네 가슴을 열어 진짜 불법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이큐 선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때가 되면 해마다 피는 산벚꽃. 벚나무 가지를 쪼개 보라. 거기에 벚꽃이 있는가?”
이 정도의 경지는 몸이 천지자연 그 자체가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는 지식, 언어가 가로막는 사고의 틀을 깨기 위해, 오랫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수행을 했을 것이다.
현대 철학의 문을 연 니체도 그러한 경지에 오른 듯하다. 그는 말한다. “고독한 자는 말한다. -사람은 고독에 따르기 마련인 많은 권태와 불쾌한 감정, 지루함의 대가로 자기 자신과 자연에 더 깊이 침잠하는 그 15분을 얻는다.”
그는 그 15분이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제일 힘이 되는 생명의 물’이라고 말한다.
이 생명의 물을 마신 사람은 더 이상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근원의 세계에 들어갔으니까.
이 세계에 들어가 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기운을 준다. 사람들은 장그래를 만나며 서서히 변화한다.
늘 미생인 존재로. 늘 생기로 가득 찬 존재로. 작은 아이와 함께 미생을 얘기하며, 나와 작은 아이도 미생으로 변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