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스승
스스로 배우려고 분발하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고, 모르는 것을 묻고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깨닫도록 알려 주지 않으며,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을 때 나머지 세 가지를 알려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다시 가르쳐 주지 않는다.
공자, <논어 제7편 술이(述而)>에서
초등학교 옆을 지나가다 가끔 학교에 가기 싫어 발버둥을 치는 아이와 어떻게 하든 학교에 보내려는 엄마의 사투를 볼 때가 있다.
웃음이 나온다. 아이의 얼굴이 결연하다.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국민이면 당연히 가야 하는 학교를 아이는 거부하고 있다. 강하게. 저 모습을 공자가 보면 뭐라고 할까?
우리가 성인으로 우러러마지 않는 공자의 교육에는 전혀 인(仁)이 없어 보인다. 그는 전혀 ‘친절한 스승’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배우려고 분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을 묻고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을 때 나머지 세 가지를 알려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하든 가르쳐주어야 하는 게 스승이 해야 할 일 아닌가?
우리는 ‘친절한 교사’를 좋은 교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30대 중반에 문학 공부를 하러 갔다가 친절하지 않는 강사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그 분들에게서 진정한 스승을 보았다. 냉혹한 선생님들에게서 나를 냉혹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문학을 공부하는가?’ 나는 그때 나 자신을 냉혹하게 성찰했다.
아마 그때 선생님들이 친절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내가 강사가 되어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을 때 나도 친절하지 않게 되었다.
학문(學問)은 배우고(學) 묻는다(問)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질문하지 않는 공부를 해왔는가?
단지 잘 먹고 잘 살려는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는 질문할 줄 모르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님과 세상이 가라는 길로 가는 사람에게 무슨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학교에 갈 때 부모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선생님 말씀을 잘 듣기만 하는 교육, 우리의 단편적인 지식위주의 입시 교육에 딱 맞는 교육 방식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 발버둥을 치는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그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보자.
그 아이들은 생각할 것이다.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 거야?’ 아이들의 이런 질문에 우리는 대답해 줄 수 있는가?
아이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눠서 아이들이 분발하여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왜 우리는 찾아줄 수 없는가?
아이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공부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 온 몸으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지난 학창 시절을 되돌아본다. 의무적으로 열심히 다닌 학교였다. 그때 간간히 떠올랐던 질문들이 많았다.
그 질문들을 동급생들, 선배님들, 부모님들, 선생님들에게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찬란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