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죄와 벌

by 고석근

죄와 벌


우리가 실제로 죄를 저지르고 있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을 사회적인 관계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매개적으로 관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스테이크를 먹습니다. 나는 군사적·경제적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습니다.


- 가라타니 고진, <윤리21>에서



교직에 있을 때 담임을 맡고 있는 반에서 가끔 학생들이 돈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색출’은 참으로 어려웠다. 자주 겪으며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다. 최근에 유난히 씀씀이가 헤픈 아이를 찾아내면 되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가는 곳은 뻔했기에, 금방 밝혀졌다. 그런 아이들을 추궁하다 보면, 드디어 범인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격침해인데,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른들 사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장발장 같은 생계형 범죄와 다른 흉악한 범죄들은 과소비가 심한 사람들이 저지르지 않을까?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 벌어지는 천륜을 어기는 범죄들을 보면 사치를 하는 사람이 범인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비’가 현대인의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비의 양과 질로 현대인의 존재가 결정된다. ‘어디에 사느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무엇을 갖고 사느냐?’

이 모든 것들은 ‘돈을 얼마만큼 썼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이 아닌가? 그러니 이 세상은 누구나 범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구조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이 발한다.


‘우리가 실제로 죄를 저지르고 있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스테이크를 먹습니다. 나는 군사적·경제적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죄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프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소에 대해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소를 대량 사육하기 위한 비위생적인 축사들. 거기서 단지 좋은 고기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소들을 생각해 보라.


다들 선진국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높은 생활수준은 어떻게 유지 되겠는가? 군사적·경제적 제국주의와 연결이 되지 않겠는가?


동물들은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다른 동물을 잡아먹더라도 배가 부르면 끝이다. 더 이상의 살육은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생각하는 존재’라, 배가 불러도 다음에 배가 고플 때를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는 무자비한 살육이 일어난다. 어떻게 하면 욕망의 존재인 인간이 절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착하게 살아가면 될까? 종교에서는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는다.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다.


왜 그럴까? 나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도 선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큰돈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은 전정한 선행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신(神), 도(道)에 대한 믿음은 자신을 넘어서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비프스테이크를 폭식하는 삶, 너무나 높은 생활수준을 누려야 하는 삶을 벗어나 소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믿음은 죄를 저지르지 않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벌을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풍요로운 시대에 사는 우리는 항상 마음이 공허하다. 권태가 오고 우울증에 걸린다. 우리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친절한 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