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소유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우리 생활의 정상적 기능이다. 즉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물건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소유하는 것―그것도 더욱 많이 소유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한 문화 속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어떻게 소유와 존재간의 선택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간의 선택을 그들 각 체제의 중심적인 문제로 삼아 왔다. 석가모니는 인간 발전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이 만일 세계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에서
언젠가 읽은 중국의 옛 이야기, 사이좋은 형제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형의 눈에 누런 금반지가 눈에 띄었다.
형은 금반지를 집어 들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금반지를 멀리 던져 버렸다.
금반지는 형제 사이에 아무런 파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사라졌다. 하지만 형이 금반지를 갖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금반지 하나가 일으키는 일파만파의 파문. 앞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형제 사이는 어떻게 될까?
형은 금반지가 일으키는 파문 앞에 속수무책이 될 형제의 미래가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두 사람의 사이는 예전처럼 이어져갈 수 있었을까? 금반지가 일으키는 파문이 형의 마음에 일어나고 그 파문이 동생의 가슴에서도 일어나며 두 사람은 그 파문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여려 조그만 바람에도 생채기가 난다. 그 생채기는 점점 커지게 된다.
그래서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우리에게 삶의 두 양식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다그친다. “소유냐? 존재냐?”
그는 말한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물건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인간 발전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이 만일 세계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중국의 옛이야기에서 형은 자신의 물질적 이익보다 ‘사이좋은 형제’를 택했다. 하지만 한번 맛본 물욕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몇 년 전에 ㅅ 마을 협동조합의 이사장직을 맡은 적이 있다.
소유양식이 아닌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 단체에서는 조그만 카페를 운영했다.
그 카페는 모든 조합원의 소유인 사회적 기업이었다. 인간은 타고나기를 ‘사회적 동물’이라 남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안에서 솟아 올라오는 기쁨이 진정한 행복이다. 소유에서 오는 쾌락은 기쁨과 다르다.
쾌락은 밖에서 주어지기에 다시 밖으로 나간다. 쾌락이 사라진 자리에 불쾌가 들어선다.
쾌와 불쾌의 크기는 같다. 그래서 소유양식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찾아 나선다.
기괴하고 변태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현대인은 점점 피폐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 존재양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곳곳에 생겨나는 여러 작은 사회적 기업, 문화 공간들이 희망의 싹일 것이다. 그 싹에 우리는 물을 주어야 한다.
인류의 긴 역사로 보면 소유양식의 삶은 최근의 삶이다. 인류는 수 만년의 원시시대에는 존재양식의 삶을 살았고, 그 후에도 존재양식의 삶을 중심에 두었다.
그러다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이 일어나며, 물질의 풍요를 맛보게 되었다. 이 풍요에 취한 시대, 하지만 인간이 언제까지 자기를 잃고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