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역전에서 길을 찾다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다. 기쁨이 있는 곳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또한 기쁨이 있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영등포역에서 부천가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전동차에서 내렸다. 밤 1시가 넘은 시간이라 승강장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밤의 영등포역은 거대한 괴물 같다. 그의 속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온다. 눈을 지그시 감고 식식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그가 언제 눈을 홉뜨고 몸을 일으킬지 모른다.
밖으로 나오자 거리와 건물들이 뿌연 안개에 싸여있다.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차들, 사람들. 정글 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언젠가 이 시간쯤에 이 길을 걸어가는데 누가 불쑥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담배 불 좀 빌릴까요?’ 나는 못 들은 채 종종걸음을 쳤다. 그가 내게 진정 원한 것은 무엇일까? ‘돈일까? 정일까?’
아니 버스정류장이 어디 갔지?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서 있어야 할 곳에 웬 검은 차들이 서 있다. 검은 차 옆엔 화장을 짙게 한 여자들이 붙어 서 있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순간 영업하는 자가용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읽은 것 같다. 집에도 가고 사랑도 하고.
나는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사람 사는 곳, 말을 섞어보고 싶었다. “부천 가는... ”하는데 “이거요... ”하며 검은 차들을 가리킨다. 나는 다시 “부천가는 버스 어디서 타요?”하고 물었다. ‘차를 타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귀찮게 해?’하는 얼굴 표정을 예상했다.
하지만 술기운이 있는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삭막해져가는 세상이라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나는 사람 심리 실험하듯이 행동했다.
한 여자에게서 예상밖으로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기 롯데 백화점 앞으로 가시면 돼요.” 그녀가 새끼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내 뒤쪽으로 몸을 돌리며 나는 “고맙습니다.”하고 말했다.
걸어가는 내 뒤에다 대고 그녀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길 중앙에 버스정류장이 있어요.” 아, 나는 눈시울이 붉혀졌다. 사람의 심성은 원래 이렇게 착한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이며 크게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내 몸이 둥둥 뜨는 듯 했다. 사람 사는 곳엔 언제나 정이 흐른다. 그 정의 물결을 바라보면 사람으로 산다는 게 뿌듯해진다. 이런 심야시간의 도시에도 언제나 정의 물결이 흐르는 곳은 있는 것이다.
아까부터 택시 한 대가 ‘빈차’라는 빨간 불을 켜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저 계곡에도 정이 흐를까? 나는 우렁우렁 ‘안산이요! 안산!’ 외치는 거구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부천가는 버스 어디서 타야 합니까?” 그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물어보았다. 물론 귀찮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에게 택시를 타 주듯(가끔 우리는 빈 택시가 안쓰러워 택시를 타지 않는가?) 그도 이런 길을 묻는 자에게 친절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역시 예상대로 퉁명스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쪽이요... 저 쪽... ” 고개만 까닥이며 그는 입 속으로 우물거렸다. 손님도 없는 이 시간에 그는 짜증도 날 것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나는 “네.” 자그맣게 대답하며 지하도를 건너고 횡단보도로 걸어가 롯데 백화점 앞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들이 환하게 불을 켜고 달려왔다. 버스중앙차로가 생긴 지 오래 되는데 나는 여기서 버스 탄지가 오래되어 예전에 있던 버스정류장만 생각한 것이다.
이제 나는 길을 찾았다. 버스만 타면 된다. 세상이 아무리 안개와 어둠에 싸여 있어도 사람의 정만 흐른다면 우리는 쉽게 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정이 흐르지 않는다면, 정이 바짝 말라 길바닥이 쩍쩍 갈라져 도무지 길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이 다니지 않아 온 세상이 정글이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글 속을 빠져 나올 수 있나?
88번 버스가 왔다. 부천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보인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라타며 카드를 댔다. 찍-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자리에 앉으며 영등포역을 봤다. 거대한 고대의 유적 같다.
그 안에 들어서면 괴물 속 같은데 밖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경외감을 주는 고대 사원 같다. 거리엔 사람들이 놀이 나온 것 같다. 나는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봄은 숲에서 오는 것
도시에는 오지 않네
쌀쌀한 도시에서
손을 잡고서
나란히 둘이 걷는 사람만
언젠가 한 번은 봄을 볼 수 있으리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봄을 그대에게》부분
도시에는 오지 않는 봄. 하지만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면, 봄이 오는 기적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