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도 몸의 도구, 즉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그것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20세기 한국불교의 최고의 선승으로 일컬어지는 경허 선사는 젊은 시절에 경전에 통달한 명강사였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은사인 계허 스님을 만나러 서울로 가는 길에 충남 천안의 한 마을에 들렀다고 한다.
그때 그는 역병으로 멀쩡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경전의 수많은 교리들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다시 동학사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용맹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돌연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역병을 만나고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경허와 깨달음을 얻은 경허는 어떻게 다를까?
깨달음을 얻기 전의 경허의 정신은 니체가 말하는 ‘작은 이성’이었다. 몸 안에 갇혀 있는 마음.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아는 마음. 심층심리학자 칼 융이 말하는 자아(自我 ego)다.
이 자아는 평소에 자신의 몸밖에 모른다. 그러다 위기에 처하게 되면,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지식을 아무리 쌓더라도 이 자아는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경허는 역병을 만나 자아의 한계를 처절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골방에 틀어박혀 ‘역병 앞에서 벌벌 떠는 자신의 마음’을 화두로 삼고 정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그는 한 사미승의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는 한순간에 모든 의문이 풀어졌다고 한다.
소는 우리의 마음의 상징이다. 그는 ‘마음은 굳이 코뚜레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마음은 애초부터 천지자연과 하나가 아니었던가? 오! 나는 천지자연과 하나였구나!’ 몸에 갇혀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져 나와 천지자연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의 집은 그의 몸이 아니라 삼천대천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어디에 있는가?
삶은 어디에 있는가? 나와 천지자연의 합일, 삶과 죽음의 합일. 그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된 것이다.
니체는 자아의 마음을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그것의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인도와 네팔에서 주고받는 인사말 ‘나마스테’는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니체가 말하는 ‘커다란 이성’, 경허 선사가 깨달은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이 바로 이 신(神)이다.
그래서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신이 거하고 계시니까. 하지만 자아는 평등하지 않다.
자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다. 나는 남편이고 아내이고 아버지이고 엄마이고 자식이고 공무원이고 회사원이고 부장이고 과장... 이다.
이 자아는 평등하지 않다. 위계가 있다. 리더와 팔로워가 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리더가 되기도 하고 팔로워가 되기도 해야 한다.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군자는 모든 인간 속에 신이 있음을 알기에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릴(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지(同) 않다(不)는 것을 안다. 상황에 따라 리더와 팔로워 역할을 잘하게 된다.
그런데 소인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신이 살고 있음을 잘 모른다. 그래서 사람을 자아로만 평가한다. 서로 존중하지 않고 질시하기에 잘 어울릴 수가 없다(不和).
따라서 그들은 상황에 따른 리더와 팔로워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서로 다투다가 결국에는 무조건 하나가 되려한다(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