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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콤플렉스

by 고석근

좋은 사람 콤플렉스


노예적 사유방식에서 선(善)은 어떠한 경우에도 위험하지 않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착해서 속이기 쉽고 약간 미련하며 아마 호인(好人)일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피안>에서



나는 젊었을 적에 ‘세상 사람들이 나만큼만 착하게 살면 세상이 참 좋아질 텐데’하고 생각했었다.


나는 니체가 경멸하는 ‘호인(好人)’이었던 것이다. 이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벗어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전래 동화 ‘심청전’에서 심청은 소경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팔려간다.


언뜻 보면 효를 권장하는 동화 같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속에 담긴 의미는 심청이라는 한 소녀의 ‘자기실현(自己實現)’이다.


아이가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떠나야 한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사회의 상징이다.


한 사회는 도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된다. 옛날에 강조되었던 충효는 봉건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사상)였다.


그런데 충효의 도덕은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굳어버리게 되면 진정한 충효가 되지 못한다.


한용운 시인은 술에 취하면 젊은이들에게 소리쳤다고 한다. “나의 머리를 딛고 넘어가라!”


한용운 시인은 그 시대의 아버지의 대표로서 젊은이들에게 소리친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를 극복하라면 그 시대의 도덕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를 나와 충효를 하겠다며 총독부에 관료로 취직했다면, 그건 진정한 충효가 아니지 않겠는가?


한 시대의 도덕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할 수 있어야, 그 시대의 진정한 도덕을 새롭게 세울 수 있다.


심청이의 아버지가 소경인 것은, 딸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보는 아버지라는 상징이다.


‘가부장적인 의식’을 지닌 아버지를 떠나야 딸은 진정한 어른이 되고 나중에는 진정한 효도를 할 수 있게 된다.


효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팔려간다는 설정은 문학적 장치다. 그렇게 해야 그 시대의 도덕과 충돌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으니까.


아버지를 떠난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게 된다.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심청은 죽어야 한다.


용왕의 도움으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 심청은 왕비가 된다. ‘최고의 여인’이 되는 것이다.


심청은 금의환향하여 소경들을 위한 잔치를 열고, 아버지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는 눈을 뜨게 되고 이어 다른 소경들도 눈을 뜨게 된다.


한 시대의 도덕에 갇혀 있으면,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니체는 도덕을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나눈다. 주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으로 나눠서 본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말하는 블리스(희열)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간다. 자신 안에서 솟아올라오는 희열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주인이다.


노예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 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주인이 만든 선(善)한 행동을 한다.


이런 노예가 사람들 눈에 호인, 좋은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사람 참 좋지!”


니체가 말하는 ‘노예적 사유방식’이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위험하지 않은 인간’이고 ‘착해서 속이기 쉽고 약간 미련한 인간’이다.


이런 노예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발전의 동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점점 퇴락하게 된다.


우리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재구성해 가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 안의 희열로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되어 가면 자신의 소명,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우리는 ‘선악(善惡)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으로 선하게 살아가려면 먼저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되는 과정은 험난하다. 그래서 공자는 군자와 가까이 할 수 없으면 차라리 광자(狂者)를 가까이 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광자,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방황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길을 제대로 찾아가겠는가?


하지만 이런 사람은 끝내 길을 찾게 된다. 처음부터 착하게만 살아가려는 사람은 아예 가능성이 없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향원(鄕員)이라고 했다. 향원은 지역, 직장, 단체에서 호인 소리를 듣는 사람을 말한다.

공자는 이런 사람은 덕(德)을 망친다고 했다. 덕이라는 것은 자신의 도(道)를 찾아 갈 때 밝혀지는 빛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들의 블리스를 따라가야 한다. 블리스를 따라가면 우리가 가야 할 길(道)을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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