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객관성이란 이해관계를 떠난 사유가 아니다. ...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관점에 입각한 ‘앎’일 따름이다. ... 하나의 대상을 보기 위해서 보다 많은 다양한 눈을 사용할수록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객관성’은 보다 완벽해질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20세기의 위대한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근거 있는 믿음의 근거에는 근거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
한때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천상에는 신들이 산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들은 그 당시에는 ‘근거 있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이전에 ‘근거 없는 믿음’이 먼저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인식도 ‘진리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말했다. “매미는 봄과 가을(春秋)을 알지 못한다.” 여름 한철 살다가는 매미는 봄과 가을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뇌에는 수만 년 전에 인지혁명이 일어났다. 경험하지 못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 상상력이 생겨난 것이다.
이 상상력으로 인간은 신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면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말을 하게 되면 상상력의 산물들이 실체가 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도 확신을 갖고 말을 한다. 객관적인 사실인 듯이.
이 망상을 깨기 위해서는 우리는 풍부하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세상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대상을 보기 위해서 보다 많은 다양한 눈을 사용할수록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객관성’은 보다 완벽해질 것이다.
코끼리의 몸을 만져 본 소경들은 각자의 경험으로 코끼리의 몸을 상상한다. 코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를 뱀 같다고 상상할 것이다.
다리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가 큰 기둥 같다고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경험이 진리는 아니다.
코끼리를 만져 본 많은 소경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서야, 우리는 코끼리의 실제 모습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상상한 코끼리도 실제의 코끼리 모습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소경이 아닌 사람의 눈으로 코끼리를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눈으로 본 코끼리는 진짜 코끼리일까? 우리는 자신의 눈도 믿어서는 안 된다. 코끼리를 처음 보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과거에 보았던 동물의 기억으로 코끼리를 보게 된다.
과거에 소를 보고 살았던 사람은 코끼리가 큰 소로 보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부시맨은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본 것을 믿지 말고 관찰을 해야 한다. 항상 세상만물을 처음 본 듯이 봐야 한다.
처음 본 듯이 보려면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오래 바라보게 되면, 생각이 사라져 뇌가 아니라 눈으로 보게 된다.
김달진 시인은 어느 날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나 보다 샘물을 발견하고서 들여다보게 된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그는 기적을 보게 된다.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무심히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을 내려놓고 바라보게 되면, 삼라만상이 그대로 보인다. 조그맣게 보이던 샘물이 바다같이 넓어지게 된다.
‘크다- 작다’라는 이분법이 깨지게 된다. 그는 잠시 후에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아 있게 된다.
시인은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것이다. 신선이 된 것이다. 우리는 ‘생각’ 하나로 한순간에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믿음에서 출발하지 말아야 한다. 관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무심히 바라보다 생각들이 꽃처럼 피어나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망상이 되지 않는다. 어떤 믿음에서 출발한 생각들은 자신과 남들에게 커다란 폭력이 될 수 있다.
역사상 무자비한 폭력들은 다 ‘선한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릴 적부터 세상만물을 무심히 바라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때 피어나는 언어들은 시(詩)가 된다.
우리 모두 시인이 되어야 한다. 시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그대로 눈부시게 아름답다.